칼럼57 [광일춘추 - 장석주 시인]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앙리 루소의 ‘잠든 집시’(1897)란 그림을 좋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 푸르스름한 밤의 창공에 하얀 달이 떠 있다. 지평선 아래 갈색의 대지에는 집시가 악기를 옆에 둔 채로 곤하게 잠들어 있다. 잠든 집시에게 수사자 한 마리가 다가온다. 이 기이한 환각 같은 집시의 꿈을 묘사한 단순한 구도의 그림에 내 무의식은 자극을 받는다.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김광섭, ‘비 개인 여름 아침’) 이 맑고 깨끗한 여름 아침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꿈이 아닐까? 꽃 피고 새 울며, 못 속에 금붕어가 노니는 이 평화로운 아침에 맞는 오늘이 우리가 꾸는 긴 꿈 중 일부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우리는 자는 동안 .. 2021. 6. 13. [고규홍의 나무 생각]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더 멀리 씨앗을 퍼뜨려 생존 영역을 확장하는 건 모든 나무의 생존 본능이다. 사람의 눈에 뜨이든 안 뜨이든, 세상의 모든 나무는 꽃을 피운다. 꽃 피고 지는 시기로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그럴 만큼 계절의 흐름이 혼란스럽던 지난봄에도 나무들은 제가끔 자신만의 꽃을 피웠다. 꽃 지자 이제 열매 맺고 씨앗을 키울 차례에 돌입했다. 크든 작든, 화려하든 밋밋하든, 모두가 꽃을 피우던 지난봄. 무화과나무는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부터 먼저 맺었다. 그리고 여느 나무들이 도담도담 열매를 키워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여름 햇살을 한껏 받아들이며 한창 열매를 키우는 중이다. 꽃(花) 없이(無) 열매(果)를 맺는다는 뜻의 이름처럼 무화과나무는 정말 .. 2021. 6. 12. 진실과 화해로 가는 길 - 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과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년간 신청을 받고 진실 규명 작업을 한 지 15년 만에 다시 한국 현대사의 어둡고 아픈 부분을 드러내 치유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번 진실화해위원회는 제1기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미진했던 사건들을 처리하고, 또 인권 의식의 고양과 함께 새로 제기된 문제들을 처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작년 12월 10일 진실 규명 신청 첫날, 한 피해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들에게 진실 규명 신청은 말하지 못했던 고통과 강요된 침묵을 깨는 것이어서 많은 용기가 필요한 실존적 결단이기도.. 2021. 6. 8. [월요광장] 부득이 돈키호테를 다시 읽는다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요즘 들어 ‘돈키호테’를 현실에서 읽는 듯 시야가 어지럽다. 돈키호테는 엉뚱해서 유쾌한 희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별 일 없이 그럭저럭 지내던 이달고라는 스페인의 시골 귀족이었다. 이달고는 어느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사도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우연한 계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달고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허구는 현실보다 더 매력적인 이달고의 ‘현실’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형편없는 기사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개하다가, 자신이 ‘진짜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운명적인 결심을 한다. 오직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자, 그리고 ‘명성과 .. 2021. 6. 7. 이전 1 2 3 4 5 6 7 8 ··· 15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