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돈키호테’를 현실에서 읽는 듯 시야가 어지럽다. 돈키호테는 엉뚱해서 유쾌한 희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별 일 없이 그럭저럭 지내던 이달고라는 스페인의 시골 귀족이었다. 이달고는 어느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사도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우연한 계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달고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허구는 현실보다 더 매력적인 이달고의 ‘현실’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형편없는 기사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개하다가, 자신이 ‘진짜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운명적인 결심을 한다. 오직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자, 그리고 ‘명성과 이름을 길이’ 남기자는 각오였다. 이렇게 해서 녹슬고 낡아 빠진 중세의 갑옷을 입고, 비쩍 마른 데다 피부병까지 앓는 볼품없는 말을 탄 중세의 기사 돈키호테가 탄생하였다.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대표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욕망의 본질과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욕망과 존재를 완전하게 일치시키는 인물이다. 그에게 욕망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달고가 어떤 계기에서 돈키호테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달고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기사소설을 읽고 ‘분별력을 완전히’ 잃고 스스로 자신이 동경하던 기사가 되기로 작정한다. 이 지점에서 르네 지라르(1923∼2015)는 이달고가 돈키호테라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왜 ‘중개된 욕망’인가를 말한다.
멋진 기사가 되어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돈키호테의 결단은 다른 대상에 대한 동경에서 나온 모사되고 굴절된 욕망이다. 자신의 내면과 자생적 힘에 의해서 생긴 욕망이 아니다. 결점 투성이의 기사들이 나대는 것을 두고 보는 것은 비겁한 일이기에 자신이 ‘권력의 남용을 막으며’ 올바른 세상을 재건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패와 부당함이 넘치는 현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숭고하게 빛나는 정의감으로 자신의 결심을 무장한다. 결단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욕망이 어떻게 아름다운 이상(理想)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지점이다.
모방된 욕망에는 욕망하는 이유와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모방으로 얻는 결과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다른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며 욕망하지 않으면, 아무도 같은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이 간접화된 욕망은 계속해서 확산되면서 조직화되며, 여기에 파괴적 독이 있다. 이를 위해서 모방된 욕망을 품은 사람은 자신에게 순종할 사람과 가상의 적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욕망이 정당해지기 때문이다. 원래는 농부였으나 기사에 대한 흠모로 돈키호테와 동행하는 산초가 순종자이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풍차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죄 없는 풍차는 사실 돈키호테의 망상이 만들어낸 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읽으면 처음에는 유쾌하게 웃다가 차츰 혀를 차게 된다. 돈키호테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올라 오는 순간에는 한참 심란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복제된 욕망, 기성품의 욕망들이 전시된 시장 판에 바로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돈키호테와 산초를 향한 허탈한 웃음과 답답함이, 돈키호테이거나 산초의 모습을 한 우리 스스로에게 보낸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 속 돈키호테들의 유혹이 거세지는 시절이다. 소설의 돈키호테는 현실의 왜곡된 욕망을 비춰 주는 거울이지만 세상의 돈키호테들이 가진 목표는 다르다. 이들은 복제된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반목과 부정을 도구화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처럼 새로운 이름표를 내건 낡은 깃발들이 사방에서 펄럭인다.
하지만 우리 안의 가짜 욕망을 식별하는 일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다. 내 욕망을 먼저 만나자. 그리고 묻자. 스스로 가짜 기사라도 될 수 없다고 해서 가짜에 굴종하는 산초가 될 것인가를. 그리고 허풍선이 가짜 기사가 어디에 왜 필요한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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