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은 지난 5월 27일자 석간 1면 머리기사로 41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지에서 촬영한 본지 기자의 사진 필름 247컷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촬영자는 당시 오사카본사 사진부 기자였던 아오이 가쓰오(2017년 작고) 씨로, 그는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사이토 다다오미(2014년 작고) 씨와 함께 1980년 5월 19~23일, 27~28일에 광주시내에 들어가 취재를 감행했다. 컬러 사진이 57컷이나 포함된 이 필름들은 그야말로 목숨 건 취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사히신문은 발행부수 약 500만 부의 전국 신문이며 도쿄·오사카 등 4개 본사 체제로 지역색을 반영한 지면을 편집하고 있다. 물론 공통의 기사도 많지만 1면은 도쿄나 오사카 등 지역 본사마다 각각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기사는 전국이 모두 똑같이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그만큼 이번 사진 발견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일본에서는 ‘광주사건’으로 불리는 5·18은 사실은 일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역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는 두가지 배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2018년 일본에서도 개봉해 히트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상태로 광주로 잠입 취재해 인권 침해 실태를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힌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영화로 인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 무척 많아졌다.
다른 하나는, 지난 2월 미얀마에서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국군이 자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보면서 41년 전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탄압과 그에 저항한 사람들의 존재를 상기하는 사람이 작지 않았다. 석간 기사가 실리기 전날인 5월 26일자 아사히신문 조간에는 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사람들과 광주 사람들 사이에 연대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서울지국발 기사가 실렸다.
이런 토양이 형성된 상황에서 컬러로 생생하게 5·18을 담은 사진이 나타나 일본 독자들은 충격을 받은 동시에 그 의미와 중요성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사진의 발견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서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는 뉴스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름이 왜 이제야 발견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지금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80년 당시 필름 보관 장소가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신문에 게재되지 않은 필름은 촬영자에게 돌려주는 관행이 있었다. 퇴직 후에도 사진사로 활동한 그는 자택 2층 다락방에 필름을 보관해 왔다. 그는 2007년 사이토씨와 함께 호남대에 초청돼 강연하면서 사진 일부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필름 보관 장소를 가족에게 미처 알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부터 올해에 걸쳐 그의 두 자녀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필름을 발견해 본사에 연락했다. 그 우연이 없었더라면 필름은 지금도 남몰래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오이씨와 사이토씨가 왜 1980년 5월 19일 긴박했던 시기에 광주시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도 언급해 두고 싶다. 두 사람은 당시 아사히신문의 창간 100주년 기념 기획 ‘세계 30만㎞ 한국편’ 취재를 위해 우연히 한국에 입국했었다. 5월 18일은 동해안 속초에 있었지만 서울지국장으로부터 “광주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광주에 들어갔다. 그 전날 서울에서 직접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한 일본 미디어 기자가 검문에 걸려 쫓겨났으므로 일반 버스를 이용한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고 한다. 5월 23일 광주를 나설 때는 산길을 걸어 검문을 통과하고 소형 트럭을 소유한 농부에게 간청해 서울로 돌아와 미국 통신사 회선을 빌려 송고했다. 사이토는 회상록에 ‘어떻게든 이 참상을 일본에, 세계에 전해 달라’고 하는 현지 의사의 말이 마음에 있었다고 적었다.
필자는 이번 취재를 통해 선배 기자의 용기와 사명감에 감명받은 동시에 당시 한국인들도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면 검열로 인해 당시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사진을 남긴 한국 기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 서울에서 손으로 쓴 전단을 뿌리고 분신자살하는 등 자신의 신체를 미디어로 삼아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려던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있었던 사실도 새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석간 기사에는 지면 관계로 5·18 때 외국 기자들이 했던 역할만 조명했지만 앞으로는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의 궤적도 일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아사히신문은 현재 필름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고 있다. 저작권 문제 등의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긴 하지만 인류의 유산으로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검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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