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툭 하면 ‘소고기 원산지 속인 일당 검거’ 이런 기사가 뜬다. 원산지를 속이면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원산지를 위조한다는 건 수입을 국산으로 속인다는 의미다. 국산이 더 고평가 받기 때문이다. 부위마다 다르지만 최소 두 배에서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소·돼지·닭고기가 모두 그렇다. 국내산으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 국산은 귀하고 비싸다. 특히 갈비는.
수입산이 최고로 대접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고기도 수입산을 더 쳐 주었다. 한우보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고기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미군부대가 있는 주요 도시에는 도깨비시장이 있었고, 부대에서 유출된 고기를 몰래 팔았다. 엘에이(LA)갈비가 히트를 친 것도 이런 도깨비시장 유출품에서 비롯됐다. 미국에선 갈비가 그다지 고가 부위가 아닌데다, 갈비가 원래 질기므로 뼈와 고기를 90도 각도로 얇게 썰어서 포갈비처럼 구워 먹도록 한 게 엘에이갈비다. 지금도 한우는 엘에이갈비로 가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중저가 수입육 갈비를 처리할 때만 이런 방법을 쓴다.
엘에이갈비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국에서 시작하여 오히려 미국 엘에이로 역수출돼 각광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현지 교민이 상대적으로 싼 갈비를 엘에이식으로 썰어서 한국식 양념구이를 만들었더니 아주 맛이 좋아 인기를 끌었다는 얘기다. 이때 엘에이를 방문한 한국인 여행객들이 기념(?)으로 엘에이갈비 냉동품을 구입, 한국으로 가져오던 시기가 있었다. (광우병이나 돼지구제역 파동 이후 축산물 휴대가 엄격하게 단속되고 있어서 요즘은 절대 불가능하다.) 물론 미국에서 교민에 의해 시작되어 한국으로 도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듯 갈비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선호도에서 크게 차이가 나면서 원산지를 속이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외국에서는 갈비가 그다지 비싼 부위가 아니다. 이는 구이용으로 보지 않는 관습 때문이다. 갈비는 실제로 상당히 질긴 부위다. 한국의 기술자들이 갈비에 ‘다이아몬드 칼집’을 넣는다거나, 채끝 같은 부위를 갈빗대에 붙여서 파는 것(합법이다)도 다 이 때문이다. 보통 고기는 연해야 비싸다. 그러나 갈비는 질긴데 비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율배반이 성립되는 부위다. 갈비의 대명사가 ‘암소갈비’가 된 것도 암소가 연하기 때문이다.
갈비는 그냥 ‘갈비’라고 부르지만 부위마다 아주 복잡한 근육이 얽혀 있다. 그래서 한 덩어리의 갈비가 세분되어 구이용, 찜용, 갈비탕용으로 나뉜다. 갈비뼈 사이의 살을 늑간살 혹은 갈빗살이라고 부르는데, 한우의 이 부위는 거의 금값에 가깝다. 등심이 흔히 제일 비싸다고 알려져 있지만 갈빗살이 더 비싸다는 건 다들 모르는 사실이다.
물론 수입 갈빗살은 싼 편이다. 30여 년 전, 수입 갈빗살(늑간살)을 도입하여 구이용으로 팔던 서울 강남의 허름한 고깃집이 큰돈을 벌어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갈비는 언제든 벼락부자를 만들어 주는 유용한 부위였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해서, 갈비 가공을 잘하는 기술자는 우대받는다. 게다가 뼈에 다른 살을 붙이는 기술 즉 갈비를 잘 바르는 기술에는 프리미엄이 붙는다.
한국에서 갈비 붐이 인 것은 60년대라고 한다. 무슨 연유인지 선물용으로 각광받으면서 명절 수요가 급증했고, 평소에도 고급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명절 갈비짝 뇌물 급증’ ‘갈비 사재기 단속’ 등의 기사가 60년대부터 보인다. 뇌물용 갈비 수요가 커져서 갈비가 너무 비싸졌다고 개탄하는 신문 기사가 등장하는 게 그 시기였다. ‘갈비짝 선물’이라는 말은 뭔가 은밀한 거래를 상징하기도 했다.
갈비는 적어도 조선 말이나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다지 비싸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작가 김화진 선생은 이런 언급을 하기도 했다. ‘가리’는 갈비의 옛말이다. “1939년 종로 낙원동에 평양냉면집이 하나 생기더니 가리구이를 팔면서 그것을 갈비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중략) 풍로를 피우고 자배기 가득 가리 잰 것을 가지고 와서 구웠다. 하나에 5전으로 아주 쌌다.”(‘한국의 풍토와 인물’, 을유문화사, 1973)
소갈비는 수입이어도 비싼 편이니 돼지갈비라도 구워 보면 어떨까 싶다. 닭갈비도 있는데 이건 갈비라고 부르기는 모호하다. 하기야 고등어구이를 ‘고갈비’라고 이미 70년대에 학사주점에서 명명했던 역사가 있으니 이거야말로 우리가 너무나도 갈비를 좋아했던 증거 아닐까.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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