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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고규홍의 나무 생각]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

by 광주일보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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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더 멀리 씨앗을 퍼뜨려 생존 영역을 확장하는 건 모든 나무의 생존 본능이다. 사람의 눈에 뜨이든 안 뜨이든, 세상의 모든 나무는 꽃을 피운다.

꽃 피고 지는 시기로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그럴 만큼 계절의 흐름이 혼란스럽던 지난봄에도 나무들은 제가끔 자신만의 꽃을 피웠다. 꽃 지자 이제 열매 맺고 씨앗을 키울 차례에 돌입했다.

크든 작든, 화려하든 밋밋하든, 모두가 꽃을 피우던 지난봄. 무화과나무는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부터 먼저 맺었다. 그리고 여느 나무들이 도담도담 열매를 키워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여름 햇살을 한껏 받아들이며 한창 열매를 키우는 중이다. 꽃(花) 없이(無) 열매(果)를 맺는다는 뜻의 이름처럼 무화과나무는 정말 꽃송이를 보여 주지 않고 열매를 성숙시켜 간다.

대관절 꽃 없이 열매를 맺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무화과나무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을 피워야 한다. 실제로 무화과나무도 여느 나무들이 앞다퉈 꽃을 피우는 봄에 꽃을 피웠다. 다만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여느 짐승의 눈길에도 포착되지 않도록 숨어서 피었다. 그래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무화과가 아니라 은화과(隱花果), 즉 숨어서 핀 꽃으로 열매 맺는 나무라고 해야 한다.

봄이면 무화과나무의 잎겨드랑이에서는 구슬 모양의 초록빛 돌기가 올라온다. 꽃은 이 돌기 안쪽에서 무성하게 피어난다. 그러니까 결국 작은 돌기는 여러 송이의 꽃을 감싼 꽃주머니인 셈이다. 식물학에서는 이를 화탁(花托)이라고 부른다.

꽃은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기는 혼사 즉 꽃가루받이를 채비했다는 신호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의 꽃은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이루어야 할까. 만일 꽃가루받이를 이루지 못했다면 번식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무화과나무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필경 누군가가 견고한 꽃주머니 안쪽의 꽃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무화과나무가 1억 년 쯤 전에 지구상에 나타나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 오도록 도운 것은 길이 2밀리미터가 채 안 되는 매우 작은 말벌 종류인 무화과좀벌이다. 무화과좀벌은 무화과나무의 꽃주머니가 돋을 즈음이면 무화과나무를 찾아온다. 지난 일억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켜 온 약속이다.

무화과좀벌은 무화과나무 꽃주머니 끝 부분의 미세한 구멍을 찾아 안으로 틈입한다. 워낙 좁다란 구멍을 파고들다 보니 무화과좀벌은 날개가 찢겨 나가고 몸통의 상당 부분은 일쑤 터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무화과좀벌은 일억 년 동안 이어 온 생명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어이 꽃주머니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다 해어진 몸뚱이로 꽃주머니 안에 들어선 무화과좀벌은 꽃송이들을 헤집으며 꽃가루받이를 이뤄 준다. 약속은 수행했지만 그 사이에 기진맥진해진 무화과좀벌은 제 몸 안에 품었던 알을 꽃주머니 안에 내려놓고 짧았던 생을 마감한다.

다시 꽃주머니 속의 시간이 적막하게 흐른 뒤 알은 부화한다. 한데 새끼 무화과좀벌 중 수컷에게는 날개가 없다. 수벌은 태어나자마자 암컷과의 교미를 마치고 죽기도 하지만, 일부는 여리게 날갯짓하는 암벌이 꽃주머니를 벗어나 또 다른 꽃을 찾아가도록 꽃주머니의 구멍을 넓힌 뒤 생을 마친다. 암벌은 수벌의 도움으로 꽃주머니를 탈출해 비행을 시작한다. 암벌을 떠나보낸 수벌은 꽃주머니 안에 주검으로 남는다. ‘비건’이라고 부르는 채식주의자들이 무화과를 먹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우리가 식용하는 무화과는 무화과좀벌의 도움 없이 열매를 성숙시킬 수 있도록 새로 개발한 품종이기 때문에 무화과좀벌의 시체를 먹어야 할 일은 없다.

하나의 생명이 온전히 제 생명의 살림살이를 이어간다는 건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온갖 생명과의 상호 의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다. 무화과나무와 기껏해야 2밀리미터도 안 되는 미세한 생명이, 홀로 아름다울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 우매한 사람살이에 말없이 건네 오는 큰 울림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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