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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서효인의 ‘소설처럼’] 우리는 신이 아니지만

by 광주일보 2021.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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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이제 초등학생이 된 둘째 아이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다. 늙지 않고 살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왜 늙지 않아야 하냐고 물어보면 늙고, 늙고, 또 늙으면 죽으니까 늙으면 안 된다고 한다. 죽으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면서 상상만 해도 슬프다는 듯 풀이 죽어 말한다.

인류가 동물과는 구별되는 사고(思考)의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품었을 이 거대한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그런 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을 돌릴 뿐인데, 아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한다. 

올 추석에 소원을 빌면 된단다. 모두가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누구도 태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죽는 사람이 없는데 태어나는 사람이 없으면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질 거라나 뭐라나.

아이는 크면서 살고 죽는 문제는 인간의 손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훨씬 더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철학적으로 죽음을 사유한다. 인간은 모두 죽고, 나는 인간이고, 고로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간단명료하여 매섭기까지 한 명제가 우리의 삶 기저에 흐른다. 그 흐름을 되돌리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 힘이 있다면 그는 신일 것이다. 신은 탄생과 죽음을 주관할 것이다. 신은 죽지 않으며 겨우 삶의 가느다란 연명에 연연하는 인간을 굽어살필 것이다. 혹은 심판할 것이다. 신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신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우연히 태어나 죽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추석에 보름달에 빈다는 소원은 신에게가 아니라면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소원인 셈이다.

구병모 작가의 신작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詩)’에는 신인 듯 신이 아닌, 그럼에도 신에 가까운 존재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구전설화 ‘구두장이와 꼬마 요정’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인물은 그러나 요정의 모습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영원’을 산다.

그들의 능력은 전지전능함이 아닌 특수한 기술에 국한되는데, 꼬마 요정이던 시절의 주특기를 살려 가죽으로 실로 꿰어 신발을 만드는 데 숭고한 마력을 일으킨다. 그들은 장인이라는 인간의 영역 하의 직업군으로 내려와, 그저 구두를 만들면서 가죽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어디서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는 채로, 어느 날 어떻게 생이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영원히 살기에 신은 무기력하다. 자신의 주변을 가득 채운 유한한 존재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 그는 영원히 살기에 순간을 빼앗긴 것이다. 무한한 생이기에 찰나의 머무는 순간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이는 소설 속 이야기다. 우리는 언젠가 기어코 모조리 죽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구두를 만들며, 소임을 다하는 소일을 보내면서, 도리어 생의 끝을 갈구하는 듯 보인다. 끝이 없기에 끝나 버린 삶을 무두질과 바느질로 깁고 잇는 듯하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쓰여지고 삭아지고 버려지는 가죽구두의 표면에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만드는 구두가 그에게 최고의 순간이라는 듯이.

그리하여 ‘바늘과 가죽의 시’는 우리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의 찰나를 되짚게 하는 소설이 된다. 소설 속 구두장이들과 달리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찰나의 빛이 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인간에게는, 참혹하게도 그중 착하고 순하던 우리의 이웃에게는, 뜻하지 않게 죽음으로 향한 사고(事故)가 사고(思考)할 틈도 없이 닥치고는 한다. 누구도 그렇게는 죽지 않았으면 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잔인하고 애석한 운명과 그로 인한 슬픔을 한낱 인간인 우리가 감히 헤아릴 도리가 없다. 다만 앞으로 할 일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바늘과 가죽의 시’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요정은 본인의 일에 별다른 이유 없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함도, 명예를 얻기 위함도, 영생을 위함도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구두가 타인의 발을 감싸기 때문에 더 편하고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려 했다.

대부분의 끔찍한 사고는, 이러한 ‘일’의 기본에서 벗어난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 행위의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곳에서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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