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은 이름만 봐서는 ‘오동나무’와 가까운 식물처럼 생각되지만, 식물학적으로는 오동나무와 친연(親緣) 관계가 없는 나무다. 오동나무가 현삼과에 속하는 식물인 것과 달리 벽오동은 그와는 전혀 다른 벽오동과의 나무다. 하지만 벽오동 잎이 우리나라의 나무 가운데 잎 한 장의 크기가 가장 큰 나무인 오동나무 잎을 닮았다는 사실이 옛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벽오동이나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가운데 잎이 가장 큰 나무다. 잎 한 장의 길이나 너비 모두 25센티미터쯤까지 자란다. 어른 손바닥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가릴 만큼 크다는 점에서 두 나무의 잎은 비슷하다. 그러나 오동나무와 벽오동은 꽃과 열매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줄기 껍질의 빛깔에 있다. 오동나무의 줄기는 암갈색인데 벽오동의 줄기는 초록빛이 강한 청녹색이다. 근대식물 분류체계가 정비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잎이 오동나무처럼 크고, 줄기 껍질에서 푸른빛이 난다는 이유에서 이 나무에 푸를 ‘벽’(碧) 자를 앞세워 벽오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벽오동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심은 나무다. 태평성대를 이룰 지도자인 ‘성천자’(聖天子)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심은 나무가 바로 벽오동이었다. 예로부터 성천자의 상징은 중국 전설 속의 새인 봉황이었다. 봉황을 기다리는 건 곧 좋은 지도자를 기다린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봉황을 맞이하기 위해 벽오동을 심어 키운 것이다. 봉황이 이 땅에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봉황이 깃들 보금자리인 벽오동을 키우며 긴 세월 동안 어진 군주를 기다렸다. 결국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건 곧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백성의 염원이었다.
더 평안한 세상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벽오동과 함께 대나무도 심었다. 대나무를 심은 건 봉황의 먹이를 마련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그런데 대나무는 여느 식물들처럼 해마다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는 식물이 아니다. 대나무는 60년 만에 한 번씩 꽃을 피우고 꽃을 피운 뒤에 열매 맺고 죽는다. 거의 사람의 한 평생에 맞먹는 긴 시간을 한 생의 주기로 살아가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진 식물이다. 대나무가 어떻게 이토록 긴 시간의 흐름으로 살아가는지는 현대 첨단과학으로도 여전히 풀지 못한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벽오동을 많이 심고 잘 키워서 보금자리를 마련해도 먹이 없는 곳에는 봉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나무에 열매를 맺기 전까지 봉황은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던 옛사람들은 대나무를 심고 열매 맺기를 학수고대했다. 빨라 봐야 60년에 한 번 맺을까 말까 한 열매지만, 봉황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벽오동 못지않게 봉황의 유일한 먹이인 대나무도 온 정성을 기울여 키웠다. 이처럼 봉황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벽오동과 함께 대나무를 심어 키웠지만, 세월 지나며 전설은 스러져 갔고, 따라서 대나무 이야기도 벽오동에 묻혀 잊혀졌다.
경상북도 의성의 비봉산 아래에는 ‘죽림마을’ 즉 ‘대숲 마을’이라고 불리는 아늑한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이 아예 ‘대숲’이 될 만큼 대나무를 많이 심은 건 마을 뒷산이 봉황이 날아오른다는 뜻의 ‘비봉산’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성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비봉산에 찾아든 봉황이 오래 머무르도록 봉황의 먹이인 대나무를 수굿이 심어 키운 것이다. 한 그루 두 그루가 숲을 이룰 만큼 긴 세월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기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태평성대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며 오래 준비해 내공을 갖춰야 한다. 벽오동을 심고 대나무가 열매를 맺는 긴 시간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처럼, 지도자도 스스로 차분하고 오랜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저마다 금방 이 땅의 태평성대를 이룰 듯이 외장치는 허장성세가 뉴스의 첫 페이지에 오르내리는 시절이 시작됐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긴 시간 동안 태평성대를 기원한 옛사람들의 ‘사람살이’를 돌아보아야 할 때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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