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전역에는 꽤 많은 곰이 살고 있다. 대부분 반달가슴곰으로 1981년 재수출 및 약재 사용 등의 목적으로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된 곰의 개체가 400마리 가깝게 남아 있는 것이다.
한때 곰 쓸개가 몸에 좋다고 하여 찾는 이가 많았다. 웅담을 만드는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다. 곰이 느끼는 고통 또한 그러할 것이다. 다행히 웅담을 대체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되면서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간 발전한 동물 보호에 대한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국내에 남은 곰들은 사육 농가에서 남은 생이 다하길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정책적으로 중성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불법 증식되는 경우도 허다하여 우리를 탈출한 어린 곰에 대한 소식도 종종 듣게 된다.
최근 경기도 용인시에서 태어난 지 3년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곰 두 마리가 탈출하여 한 마리는 사살되고 다른 한 마리는 여태 추적 중이라는 뉴스가 들렸다. 먹이를 찾아 산을 헤매는 곰은 분명 근처의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태어나자마자 좁은 우리게 갇혀 타고난 본능 같은 것은 인간에 의해 억압되어 버린 가엾은 야생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동물의 삶을 지옥에서의 삶으로 격하시켜 왔다. 저 멀리 아프리카 초원이나 아마존 밀림까지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열악한 축사에서 고기가 될 목적으로만 키워지는 돼지와 소, 그리고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 주다 종종 버려지곤 하는 개와 고양이를 보라.
그림책 작가로 먼저 알려진 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어린이 대상의 문학답게 우선 우화의 형식을 빌린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와 어미 아비를 알 수 없어 이웃 펭귄에게서 보호받아 태어난 펭귄의 이야기다. 뜨겁고 광활한 초원을 바람처럼 달릴 수 있는 코뿔소와 차갑고 거대한 바다를 바람보다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는 펭귄이라니…. 본래의 서식지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단 하나다. 인간이 만든 동물원이다. 인간이 여러 동물을 데려와 가둬 놓고, 보호하고, 구경하는 동물원.
노든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흰바위코뿔소인 노든은 아내를 만나고 딸을 낳았으며, 진정한 코뿔소로서 자연을 영위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그런 노든을 가만두지 않는다. 밀렵꾼은 그들의 뿔을 강탈하고, 생명을 앗아 간다. 노든의 가족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고 노든 혼자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구조돼 치료받는다. 그리고 동물원에 갇히게 된다.
화자인 ‘나’는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알을 거두어 보호한 펭귄 ‘치쿠’와 ‘윔보’에 의해서 태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 나온 펭귄의 곁에는 늙은 코뿔소 노든밖에 없다. 노든과 치쿠가 그랬듯 둘은 바다를 향해 걷는다. 포기하지 않고 위험에 맞서며 혹은 슬기롭게 피하며 동행하는 둘의 긴긴밤은 빛나는 우정의 서사이자 마음 졸이는 로드무비이며 가슴 찡한 다큐멘터리가 된다.
심사평에 나오는 말처럼 ‘긴긴밤’의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긴긴밤을 며칠이나 보내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은 저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알고 있어도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코뿔소는 자신이 코뿔소임을, 펭귄은 자신이 펭귄임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한심함에 답을 찾는 여정은 한없이 구불구불해지고 희미해진다.
어떤 인간은 좋은 사람이 되어 동물을 돌보고 보호하려 애쓰기도 하지만, 소수의 노력이 상황을 반전시키리란 쉽지 않다. 대체로 악한 인간과 더러 착한 사람이 배경인 세계에서 늙은 흰바위코뿔소와 어린 펭귄은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 코뿔소는 코뿔소로, 펭귄은 펭귄으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탈출한 곰 두 마리 중, 아직 수색 중인 한 마리의 곰에게 어떤 결말이 있을지 짐작은 할 수 있다. 곰은 곰이길 원하겠지만, 인간에게 곰은 이미 곰이 아니다. 사육장에 갇힌 곰, 인간의 총에 쫓기는 곰은 원래의 곰이 아니니까. 뉴스 이후 긴긴밤이 몇 번이나 지났다. 곰에게는 특히나 긴긴밤이었을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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