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팔월이면 우리 민족이 삶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도록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그들이 남긴 삶의 자취를 찾아 바라보면서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 온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 많은 나무 중에서도 특이하게 민족 해방의 염원을 담고 살아온 나무가 있다. 충청남도 당진 ‘필경사’라는 오두막 곁에 도담도담 자라난 한 그루의 향나무가 바로 그런 나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민족 해방 운동에 헌신한 심훈이 손수 심고 키운 나무다.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심훈(沈熏, 1901∼1936)은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절창의 시편을 모아 시집 ‘그 날이 오면’을 내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충남 당진군 부곡리로 찾아들었다. 1932년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그는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당호는 ‘밭을 갈면서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으로 필경사(筆耕舍)라 했다.
그리고 집 창문 앞에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상징할 수 있는 나무를 심으려 했다. 여러 종류의 나무 가운데 민족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잃지 않겠다는 상징을 담으면서도 민족 해방의 희망과 기원을 하늘까지 전할 수 있는 신성한 나무를 심고 싶었다. 그는 결국 사철 푸르른 잎을 떨구지 않으며, 독특한 향기를 하늘까지 전하는 향나무를 골라 심었다.
심훈은 아침저녁으로 나무 곁에 머무르며 정성을 들였다. 나무에 기울인 그의 정성은 조국 해방의 그날을 그린 염원의 표현이었다. 치욕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 더 푸르고 더 향기롭게 자라는 것이 자기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이유임을 나무는 심훈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심훈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향나무를 도반 삼아 소설을 썼다.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했다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한 최용신(채영신)이라는 여성 운동가의 삶을 한 편의 소설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는 소설 집필 기간 내내 늘 곁을 지켜 주었던 향나무를 바라보다가 소설의 제목을 ‘상록수’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심훈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 해방의 날을 맞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소설 ‘상록수’가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은 것처럼 심훈이 지극정성으로 심고 가꾼 향나무도 그와 맞먹는 의미와 무게로 푸르게 살아남았다. 아직 백 년을 채 살지 않았지만 뒤쪽으로 늘어선 대나무나 오두막 앞에 새로 심은 측백나무에 비해 심훈의 향나무는 유난스레 기운차게 느껴진다. 심훈의 눈에 향나무가 먼저 들어왔던 것도 그런 옹골찬 생김새 때문이었으리라.
주인 떠난 자리에 남은 한 그루의 향나무는 돌보는 사람 없이 훌쩍 키를 키워, 필경사의 초가지붕 위로 나뭇가지를 드리웠다. 푸르른 민족정기의 상징으로 살아남은 향나무는 그를 심은 사람의 뜻에 따라 푸르게 잘 자랐다. 조국의 해방과 번영을 기원한 심훈의 염원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나무는 작지만 뜸직하고 옹골차게 자랐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을 타고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친 선조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식민지 세월을 견뎌 푸르게 가지를 뻗고 잎을 돋운 나무는, 이 땅에 식민지 시대의 상처가 잊어진다 해도 이 자리에 남아 다음 시대를 채비할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으로 우뚝 서 있을 것이다.
고난의 역사를 비롯해 이 민족의 모든 역사를 증거하는 자연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무는 사람의 자취가 모두 흩어진 뒤로 오랜 세월이 지날 때까지 사람의 향기를 기억하며 후대 사람들에게 옛 사람의 자취를 전하는 생명체다.
나라 잃은 설움을 이겨 내며 민족의 새 역사를 쓰는 심정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키운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은 그들이 심어 키운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온전히 더 아름답게 지켜 내야 할 때다. 그것이 곧 우리 조국을 지켜 준 선조들의 뜻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일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의 내일을 열어 주는 가장 큰 바탕이 되는 일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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