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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우리는 신이 아니지만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이제 초등학생이 된 둘째 아이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다. 늙지 않고 살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왜 늙지 않아야 하냐고 물어보면 늙고, 늙고, 또 늙으면 죽으니까 늙으면 안 된다고 한다. 죽으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면서 상상만 해도 슬프다는 듯 풀이 죽어 말한다. 인류가 동물과는 구별되는 사고(思考)의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품었을 이 거대한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그런 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을 돌릴 뿐인데, 아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한다. 올 추석에 소원을 빌면 된단다. 모두가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누구도 태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죽는 사람이 없는데 태어나는 사람이 없으면 이.. 2021. 6. 18.
[광일춘추 - 장석주 시인]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앙리 루소의 ‘잠든 집시’(1897)란 그림을 좋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 푸르스름한 밤의 창공에 하얀 달이 떠 있다. 지평선 아래 갈색의 대지에는 집시가 악기를 옆에 둔 채로 곤하게 잠들어 있다. 잠든 집시에게 수사자 한 마리가 다가온다. 이 기이한 환각 같은 집시의 꿈을 묘사한 단순한 구도의 그림에 내 무의식은 자극을 받는다.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김광섭, ‘비 개인 여름 아침’) 이 맑고 깨끗한 여름 아침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꿈이 아닐까? 꽃 피고 새 울며, 못 속에 금붕어가 노니는 이 평화로운 아침에 맞는 오늘이 우리가 꾸는 긴 꿈 중 일부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우리는 자는 동안 .. 2021. 6. 13.
[고규홍의 나무 생각]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더 멀리 씨앗을 퍼뜨려 생존 영역을 확장하는 건 모든 나무의 생존 본능이다. 사람의 눈에 뜨이든 안 뜨이든, 세상의 모든 나무는 꽃을 피운다. 꽃 피고 지는 시기로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그럴 만큼 계절의 흐름이 혼란스럽던 지난봄에도 나무들은 제가끔 자신만의 꽃을 피웠다. 꽃 지자 이제 열매 맺고 씨앗을 키울 차례에 돌입했다. 크든 작든, 화려하든 밋밋하든, 모두가 꽃을 피우던 지난봄. 무화과나무는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부터 먼저 맺었다. 그리고 여느 나무들이 도담도담 열매를 키워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여름 햇살을 한껏 받아들이며 한창 열매를 키우는 중이다. 꽃(花) 없이(無) 열매(果)를 맺는다는 뜻의 이름처럼 무화과나무는 정말 .. 2021. 6. 12.
[월요광장] 부득이 돈키호테를 다시 읽는다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요즘 들어 ‘돈키호테’를 현실에서 읽는 듯 시야가 어지럽다. 돈키호테는 엉뚱해서 유쾌한 희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별 일 없이 그럭저럭 지내던 이달고라는 스페인의 시골 귀족이었다. 이달고는 어느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사도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우연한 계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달고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허구는 현실보다 더 매력적인 이달고의 ‘현실’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형편없는 기사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개하다가, 자신이 ‘진짜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운명적인 결심을 한다. 오직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자, 그리고 ‘명성과 .. 2021.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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