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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19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삼겹살은 왜 지역성이 없는가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북간도’를 쓴 안수길(1911~1977) 선생은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살았다. 그 시절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북간도’를 비롯한 여러 소설이다. 우리 민족의 북간도 이주는 일제강점기 타의에 의한 성격이 강했다. 조선시대 초기 이후로 사실상 국경이 정해지면서 만주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은 물론 다수의 상인과 여러 직업인들이 만주를 거쳐 갔다. 일제가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은 결국 붕괴되었지만, 만주는 당시 우리 민족과 여러 의미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만주에 남은 많은 동포들이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살아왔고, 이들이 근래 40년 정도 이어진 한-중 교류사의 주인공인 조선족으로 등.. 2021. 12. 19.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비빔밥을 다시 본다 익산에 갔다. 호남의 관문, 한때 번성했던 상업도시. 고속열차 정차 역으로 지역 교통의 중핵이 된 곳이기도 하다. 명물 음식은 많고 많지만 황등비빔밥을 뺄 수 없다. 육회를 얹는 독특한 맛이 전국적 인기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서울에선 오랫동안 비빔밥 문화가 있었다. 60년대 언론 기사를 보면, 비빔밥을 메뉴로 내는 식당이 많았다. 내가 직장생활 시작하던 90년대도 대중식사로 비빔밥은 아주 흔했다. 온갖 외래 메뉴와 창작 메뉴, 각 지역 음식의 각축장이 된 최근의 서울에서는 비빔밥이 왜소해졌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먹기 힘들다. 몇 가지 나물과 계란, 공장제 고추장과 참기름이면 한 그릇 뚝딱하던 시중 비빔밥이 고전 중이다. 비빔밥은 매우 한국적인 음식이다. 아시아권에서도 비빔밥은 독보적이다. 중국 문.. 2021. 11. 20.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소갈비는 못 먹어도 ‘고갈비’는 먹어야지 청년기에 누가 ‘고갈비’를 사 준다고 해서 크게 기대를 하고 갔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이삼십 년 전쯤 술자리에서 흔하게 보던 생선. 아시겠지만, 고갈비는 그냥 고등어구이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도시의 포장마차나 민속주점, 학사주점 같은 허름한 술집에서는 흔하게 고갈비를 팔았다. 평범한 고등어구이를 내고 안주값을 받자니 머쓱했던지, 주인은 꼭 빨간 소스를 뿌려 냈다. 그래서 서울에선 고갈비 하면 양념을 끼얹은 고등어 정도를 의미했다. 고등어는 오랫동안 제일 흔한 생선이었다. 고등어가 귀하고 맛이 좋아서 고등(高等)어라는 얘기는 전혀 근거가 없다. ‘자산어보’에는 푸른빛이 있다 하여 벽문어(碧紋魚)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고도어(古刀魚)라는 호칭이 나온다. 아마 이게 고등어로 발음이 변했을 .. 2021. 9. 26.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중국집이 변하고 있다 광주와 전남에는 오래된 중국집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화상(華商)이라고 붙여 놓고 장사하는 중국집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1883년,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청나라 군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때 같이 온 40여 명의 상인이 화교의 시초인데, 그 후 이들 중 얼마나 한국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군대와 함께 상인이 왔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한반도를 중요한 장사의 무대로 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화교는 처음에는 주로 무역과 도소매업에 종사했는데, 점차 음식업에도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도 맞았던 모양이다. 원래 이국(異國)의 음식은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는다. 꼭 맛을 떠나서 색다른 언어·인종·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작은 세계가 식당이기 때문이다. 중국집이 이..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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