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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9

[서효인의 ‘소설처럼’] 우리는 신이 아니지만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이제 초등학생이 된 둘째 아이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다. 늙지 않고 살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왜 늙지 않아야 하냐고 물어보면 늙고, 늙고, 또 늙으면 죽으니까 늙으면 안 된다고 한다. 죽으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면서 상상만 해도 슬프다는 듯 풀이 죽어 말한다. 인류가 동물과는 구별되는 사고(思考)의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품었을 이 거대한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그런 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을 돌릴 뿐인데, 아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한다. 올 추석에 소원을 빌면 된단다. 모두가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누구도 태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죽는 사람이 없는데 태어나는 사람이 없으면 이.. 2021. 6. 18.
[광일춘추 - 장석주 시인]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앙리 루소의 ‘잠든 집시’(1897)란 그림을 좋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 푸르스름한 밤의 창공에 하얀 달이 떠 있다. 지평선 아래 갈색의 대지에는 집시가 악기를 옆에 둔 채로 곤하게 잠들어 있다. 잠든 집시에게 수사자 한 마리가 다가온다. 이 기이한 환각 같은 집시의 꿈을 묘사한 단순한 구도의 그림에 내 무의식은 자극을 받는다.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김광섭, ‘비 개인 여름 아침’) 이 맑고 깨끗한 여름 아침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꿈이 아닐까? 꽃 피고 새 울며, 못 속에 금붕어가 노니는 이 평화로운 아침에 맞는 오늘이 우리가 꾸는 긴 꿈 중 일부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우리는 자는 동안 .. 2021. 6. 13.
[고규홍의 ‘나무 생각’] 겨울, 나무의 가시가 눈에 들어오는 계절 나무들이 모두 잎을 내려놓았다. 속살이 드러난 나무들이 생체 활동을 최소화하고 겨울잠에 들 채비를 마쳤다. 소리도 움직임도 눈에 드러나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살아가는 나무들 사이로 적막이 감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뭇가지와 줄기의 속살에서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바라보게 되는 계절이다. 나무의 속살에는 나무가 이 땅에서 살아오기 위해 애썼던 안간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잎으로 무성하게 덮여 있을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나무 줄기와 가지에 무성하게 돋아 있는 가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줄기와 가시 등 식물의 몸체에 사나운 가시를 돋우며 살아가는 나무가 적지 않다. 가시는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몸체의 일부를 변화시킨 결과다. 가시를 돋운 거개의 나무는 무엇보다 먹을거리로 유용한 나무이기.. 2020. 11. 29.
[서효인의 소설처럼] 치유의 소설 , 김금희 ‘복자에게’ 제주도 곁의 섬에 간 적이 있다. 섬에 들어가는 배에서는 섬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유명 가수의 노래가 반복 재생되었다. 제주도와는 또 다른 결의 풍광에 출장이라는 것도 잊고 바람 냄새를 맡았다. 섬이 차가 다닐 만큼은 크지 않은데, 걸어 다닐 만큼 작지도 않아 우리는 자전거를 빌렸다. 그다지 보관이 잘 되었거나 신형이라고 할 수 없는 자전거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삐걱삐걱 몰았다. 섬에 왔다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몰라서 관두고 말았다. 날은 맑고 파도는 섬의 곁에 와 부딪히고 부서지고 다시 일었다. 당신은 그저 왔다 가면 그만이라는 듯이. 김금희의 장편소설 ‘복자에게’를 읽으며 짧은 여행의 반가운 기시감을 페이지마다 만날 수 있었다. 작가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위트.. 2020.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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