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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오래된 도시에는 유서 깊은 식당들이 있다. 그중에서 중국집의 존재도 뚜렷하다. 화교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반도에 들어와 살다가 1949년 중국에 인민공화국이 생기고 국교가 단절되면서 생겨난 구체적인 디아스포라다. 화교란 말 자체가 이주한 자를 뜻하는 ‘교’(僑)라는 한자를 쓴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화교의 주업이 포목점과 주물, 이발, 채소 재배,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에 선명한 중국집이다.
광주는 화교세가 꽤 셌다. 호남의 목포·군산·전주·익산과 함께 화교 학교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기초 교육을 감당했다. 인구가 충분하지 않으면 학교를 열 수 없었다. 화교는 광주에도 많은 중국집을 열었고 시대에 따라 명멸했다. 그중에서 시내에서 아직도 영업하면서 중국집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집들이 있다. 금남로에 이웃해 있는 영안반점과 제일반점이다. 광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외지인이자 중국요리사, 중국집 역사를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중식당, 중국집은 너무도 반갑다. 우선 구도심에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연회를 하거나 한 상 접대할 때 마땅한 집이 많지 않았다. 중식당은 연회석이 좋았고, 시내에 있는 결혼식장의 피로연이나 회갑연, 약혼식 등을 치르기에 적당했다. 도심 중식당은 이런 행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 호텔과 뷔페집이 생기면서 더 이상 중식당의 몫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내가 소위 ‘원도심’이 되면서 힘을 많이 잃었다. ‘원’(元)이란 옛것이란 뜻이고, 냉정히 말하면 신도심이 생겨서 사람이 줄었다는 의미다. 그런 판국에 시내에서 역사를 증거하며 장사하고 있는 두 중국집의 존재가 반갑지 않겠는가.
메뉴에도 오랜 역사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 두 집 다 이른바 ‘식사부’(옛날 중국집은 식사부, 요리부로 메뉴를 나누는 것이 관습이었다) 맨 위에 짜장면, 우동이 순서대로 올라가 있다. 사실, 요즘 중국집에는 우동을 거의 팔지 않는다. 특히 서울에서는 우동 파는 집은 손에 꼽는다. 짬뽕의 매운맛에 밀려 버린 셈이다. 담백하고 심심하고 시원한 국물 대신 짬뽕의 강렬함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두 노 중국집의 메뉴가 반가울 수밖에.
또 만두를 손수 빚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요즘 일손이 줄고 군만두가 ‘서비스’ 즉 공짜가 되면서 손으로 빚는 만두를 포기하는 중국집이 99.9퍼센트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손 만두를 지키고 있는 이런 집들이 과장해 말해서 감격스러울 지경이다. 심지어 물만두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원래 중국집에는 군만두보다 물만두, 찐만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만두들이 사라지고 군만두만 남은 이유를 몇 가지 추정하고 있다. 하나는 군만두를 철판에 지지지 않고 기름에 튀기듯이 요리하면서 주방의 공력을 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철판에 지지는 것보다는 튀기는 것이 아무래도 손쉽다. 식용유가 대량으로 싸게 유통된 것이 주원인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이밖에도 튀기는 군만두가 훨씬 자극적인 맛이어서 물만두나 찐만두를 밀어냈으리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들 노(老)중국집에는 수초면과 난자완스밥(제일반점), 오므라이스(영안반점) 같은 전설적인 식사 메뉴들이 있다는 것도 눈여겨보면 놀라운 일이다. 신세대는 잘 모르는 음식들이다. 어쩌면 잘 팔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 메뉴들을 껴안고 있는 주인들의 생각과 뚝심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오므라이스, 콩국수, 국밥 같은 메뉴를 파는 것은 화교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생존했는가를 간접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버텨 내야 했던 화교들의 중국집은 현지화에 공을 들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메뉴라면 중국집의 정체성 안에서 기꺼이 만들어 팔았다. 중국식 냉면도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다. 얼마 전에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작은 강연을 했다. 짜장면과 짬뽕이라는 주제였다. 한 관객이 이런 질문을 했다.
“광주의 중국집에서 가장 지역성이 강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광주의 중국집은 김치를 맛있게 냅니다. 서울은 밥 메뉴를 시키지 않으면 대개 김치를 주지 않습니다. 그나마 주는 김치도 맛이 없습니다. 광주나 호남 지역의 중국집에서는 특이하게도 맛있는 김치를 냅니다. 심지어 겉절이, 묵은지를 따로 내는 집도 봤습니다. 이게 광주 중국집의 지역성입니다.”
엉뚱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수긍하는 듯했다. 그렇다. 같은 화교라도 지역마다 현지화의 방법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더욱 광주의 중국집 문화를 소중하게 들여다보고 지켜가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믿는다. <음식칼럼니스트>
광주는 화교세가 꽤 셌다. 호남의 목포·군산·전주·익산과 함께 화교 학교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기초 교육을 감당했다. 인구가 충분하지 않으면 학교를 열 수 없었다. 화교는 광주에도 많은 중국집을 열었고 시대에 따라 명멸했다. 그중에서 시내에서 아직도 영업하면서 중국집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집들이 있다. 금남로에 이웃해 있는 영안반점과 제일반점이다. 광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외지인이자 중국요리사, 중국집 역사를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중식당, 중국집은 너무도 반갑다. 우선 구도심에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연회를 하거나 한 상 접대할 때 마땅한 집이 많지 않았다. 중식당은 연회석이 좋았고, 시내에 있는 결혼식장의 피로연이나 회갑연, 약혼식 등을 치르기에 적당했다. 도심 중식당은 이런 행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 호텔과 뷔페집이 생기면서 더 이상 중식당의 몫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내가 소위 ‘원도심’이 되면서 힘을 많이 잃었다. ‘원’(元)이란 옛것이란 뜻이고, 냉정히 말하면 신도심이 생겨서 사람이 줄었다는 의미다. 그런 판국에 시내에서 역사를 증거하며 장사하고 있는 두 중국집의 존재가 반갑지 않겠는가.
메뉴에도 오랜 역사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 두 집 다 이른바 ‘식사부’(옛날 중국집은 식사부, 요리부로 메뉴를 나누는 것이 관습이었다) 맨 위에 짜장면, 우동이 순서대로 올라가 있다. 사실, 요즘 중국집에는 우동을 거의 팔지 않는다. 특히 서울에서는 우동 파는 집은 손에 꼽는다. 짬뽕의 매운맛에 밀려 버린 셈이다. 담백하고 심심하고 시원한 국물 대신 짬뽕의 강렬함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두 노 중국집의 메뉴가 반가울 수밖에.
또 만두를 손수 빚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요즘 일손이 줄고 군만두가 ‘서비스’ 즉 공짜가 되면서 손으로 빚는 만두를 포기하는 중국집이 99.9퍼센트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손 만두를 지키고 있는 이런 집들이 과장해 말해서 감격스러울 지경이다. 심지어 물만두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원래 중국집에는 군만두보다 물만두, 찐만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만두들이 사라지고 군만두만 남은 이유를 몇 가지 추정하고 있다. 하나는 군만두를 철판에 지지지 않고 기름에 튀기듯이 요리하면서 주방의 공력을 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철판에 지지는 것보다는 튀기는 것이 아무래도 손쉽다. 식용유가 대량으로 싸게 유통된 것이 주원인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이밖에도 튀기는 군만두가 훨씬 자극적인 맛이어서 물만두나 찐만두를 밀어냈으리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들 노(老)중국집에는 수초면과 난자완스밥(제일반점), 오므라이스(영안반점) 같은 전설적인 식사 메뉴들이 있다는 것도 눈여겨보면 놀라운 일이다. 신세대는 잘 모르는 음식들이다. 어쩌면 잘 팔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 메뉴들을 껴안고 있는 주인들의 생각과 뚝심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오므라이스, 콩국수, 국밥 같은 메뉴를 파는 것은 화교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생존했는가를 간접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버텨 내야 했던 화교들의 중국집은 현지화에 공을 들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메뉴라면 중국집의 정체성 안에서 기꺼이 만들어 팔았다. 중국식 냉면도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다. 얼마 전에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작은 강연을 했다. 짜장면과 짬뽕이라는 주제였다. 한 관객이 이런 질문을 했다.
“광주의 중국집에서 가장 지역성이 강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광주의 중국집은 김치를 맛있게 냅니다. 서울은 밥 메뉴를 시키지 않으면 대개 김치를 주지 않습니다. 그나마 주는 김치도 맛이 없습니다. 광주나 호남 지역의 중국집에서는 특이하게도 맛있는 김치를 냅니다. 심지어 겉절이, 묵은지를 따로 내는 집도 봤습니다. 이게 광주 중국집의 지역성입니다.”
엉뚱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수긍하는 듯했다. 그렇다. 같은 화교라도 지역마다 현지화의 방법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더욱 광주의 중국집 문화를 소중하게 들여다보고 지켜가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믿는다.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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