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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이소영의 우리 지역 우리 식물] 구례, 우리 각자의 산수유

by 광주일보 202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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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우리나라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서 남미 식물 연구자를 만났다. 그는 학회에 참여한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연구 대상인 식물을 소개했고, 그 식물 중에는 우리가 흔히 재배하는 몬스테라도 있었다. 그가 내 기억에 유난히 오래 남는 것은 몬스테라를 가리켜 ‘내 집만 한 거대한 크기의 식물’이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동료들은 그의 말에 놀랐다. 그저 온실에서 보거나 문헌을 통해 아는 정보로 몬스테라 크기를 가늠할 뿐 자생지에서의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몬스테라는 화분에 심어지는 크기 2미터가 넘지 않는 식물이다.

하나의 식물을 두고도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풍경과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떠올릴 때, 누군가는 흰 꽃을, 또 누군가는 분홍색 꽃을 떠올리듯 말이다. 모두가 꽃을 떠올릴 때 무궁화 열매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식물 한 종이 아니라 특정 장소의 특정 개체를 공유하더라도 각자 다른 풍경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른 봄꽃을 피우는 식물 중에는 산수유가 있다. 나는 삼 년에 한 번은 산수유가 피어나는 삼월 구례에 간다. 구례 산동면에는 산수유 군락지가 있다. 산수유를 처음 제대로 본 것은 대학교 때 구례로 견학을 가서였다. 그전까지 산수유는 내게 그저 공원의 정원수 중 가을에 풍성한 빨간 열매를 맺는 약용식물이었다. 그런데 구례에서 본 산수유는 가지마다 노란 꽃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내가 구례를 찾은 것은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초봄이었다.

산수유 꽃에게는 황량한 겨울을 깨우는 에너지가 있었다. 보편적인 꽃은 꽃잎이 수술과 암술을 감싸는 모습이지만, 산수유 꽃은 발화하고 터뜨리는 듯한 형태를 띤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구례를 찾았다.

어느 날 조경 일을 하는 친구와 대화하던 중 산수유 이야기가 나왔다. 그도 구례의 산수유를 자주 찾는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산수유로 꽤 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가 떠올리는 구례 풍경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마을을, 나는 따뜻한 봄 햇살 속 노란 꽃 마을을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구례, 같은 산수유나무를 보고도 방문 시기가 달랐던 탓에 서로 다른 풍경을 마주한 것이다. 우리가 본 식물은 같은 것이지만 또 다른 것이었다.

나는 가을에 구례에 간 적이 없다. 친구의 가을 풍경 예찬을 듣다가 문득 왜 나는 늘 봄에만 산수유를 찾았던 것인지 후회가 됐다. 왜 가을에는 구례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초봄에는 아직 식물이 생동하는 초반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가을에는 봄과 여름 동안 관찰한 식물들을 그리느라 바빠 구례에 가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이것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봄 풍경을 마다하고 가을 풍경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운전을 할 때에도 새로운 길보다 늘 가던 익숙한 길로 가고, 새로운 책과 영화를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을 즐긴다. 가을 산수유 풍경을 보는 도전을 하기보다 좋아하는 봄 풍경을 안전하게 즐기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산수유는 가을에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산수유와 헷갈리기 쉬운 식물로 생강나무가 있는데, 둘은 꽃의 형태가 비슷하다. 그래서 꽃이 피는 봄에는 식별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둘은 전혀 다른 형태를 띤다. 생강나무는 완전한 구형의 까만 열매가 달리지만 산수유는 타원형의 빨간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가을에는 식별이 쉽다. 봄에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가을에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구례의 산수유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고, 단 한 번만 그곳에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계절을 선택할까? 그렇게 나는 올해 가을 구례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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