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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서효인의 소설처럼]북해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찾다 -우다영 장편소설 ‘북해에서’

by 광주일보 202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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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저잣거리의 마당놀이까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을 홀려왔다. 많은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의 홀림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최초의 이야기는 아마 말 그대로 이야기였을 것이다. 입에서 귀로, 귀에서 생각으로, 그 생각이 다시 입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구전(口傳)이라고 부른다. 문자를 쓰기 시작하고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야기는 이제 글로 남겨진다. 그러나 문자는 상당 시간 종교적·사회적인 쓸모로 복무하였다.

그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글자가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근대 문화의 소산으로서, 소위 부르주아나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였다. 소설의 시대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이야기는 더 새롭고 더 강렬하고 더 빠른 매체들을 만난다. 이제 이야기는 티브이, 영화, 인터넷, 오티티(OTT)를 통해 퍼져 나간다. 소설은 그 틈바구니에서 헛기침과 마른기침을 반복하며 제 몫과 명을 다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이야기의 힘은 여전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기어코 터진다. 차 한 잔하는 자리나 혹은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도 모두 이야기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흥을 더욱 돋운다. 또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상의 외피를 쓰지 않고, 만인의 시간 속에 간직된 각각의 사연을 발설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말솜씨가 있든 없든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갖는다. 소설에서 발단과 전개가 절정과 결말에 영향을 미치듯, 누군가의 앞선 이야기는 그의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 한 사람의 생애가 거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호메로스든 홍길동이든 해리포터든 깐부든 상관없이.

우다영의 신작 소설 ‘북해에서’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서로에게 틈입하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안고, 이야기가 이야기에게 영향을 미치며, 또 다른 국면에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밀어내는 이야기다. 첫 이야기는 ‘나선’의 것이다. 나선에게는 군인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젊은 장교들이 자주 집에 들락거리며 술자리를 갖는다. 아버지는 아들뻘인 그들과 교류하며 어쩌면 나선의 남편감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만나는 기분을 저도 모르게 즐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어떤 중위는 늘 정치적인 답변만 거듭하던 다른 장교와는 다르게, 자신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건 자신의 현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다.

중위의 할머니 이름은 오경, 북해의 국경지대에 살던 오경은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자신도 어느 군인에게 쫓겨 죽을 위기에 처한다. 오경과 군인은 무너진 수로에 갇힌다. 둘 사이는 작은 구멍만 나 있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 구멍으로 군인은 비상식량인 비스킷을 전달하고, 오경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라 확신하지만, 배고픔 때문에 그의 선의를 받아들인다. 군인은 벽 너머의 오경에게 철사를 꼬아 꽃을 만들어 주고, 비스킷 통도 맡긴다. 그걸 번갈아 간수하자 제안하지만, 오경은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비스킷을 넘기지 않는다. 군인은 철사에 긁혀 파상풍이 생기고, 굶주린다. 기적적으로 구출된 오경의 눈에 보인 군인의 시신은 너무나 왜소했다.

나선과 중위의 이야기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둘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존재할 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북해’가 가상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나선과 오경의 이야기도 실재하지 않는 북해와 같은 이야기로 느껴진다. 특히 중위가 전하는 자신의 할머니 오경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이야기로, 그 진실과 허위의 격차를 듣는 사람이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음은 나선의 이야기 또한 갖고 있는 형질이다.

나선의 오빠는 군인으로서 죽었지만, 사실 그는 군수품인 캐첩과 땅콩버터를 운반하다 사고로 죽었다. 기어코 살아난 이야기와 허망하게 죽은 이야기가 겹치면서 소설은 북해로 나아간다. 두 이야기의 구전자는 이제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이야기는 듣는 자로 인해 완성된다. 둘은 소설의 마지막에 와서야 현관 앞에 잠시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면 그 장면이 전부라는 듯이 소설은 결말에 닿는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좋아한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는가? 자신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달리 말하면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재미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뒤집자면, 타인의 이야기가 내 것이 될 때에야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가 된다. ‘북해에서’는 그런 이야기의 가능성을 묻는 소설이다. 삶의 죽음을 채우는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이야기의 재미를 찾은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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