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나혜석·이중섭…근대미술 태동기 화가들을 만나다
화가 천경자가 서울 서촌 누하동에 살던 때는 정신적으로 가장 여유롭고 낭만적 감성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갖는 등 마음의 안정을 찾아 자유로운 화풍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린 대표작으로 뱀을 형상화한 ‘사군도(蛇群圖)’(1969)는 그 화풍을 잘 보여준다.
창덕궁 왼쪽 담을 따라 원서동 길을 걷다보면 만나는 한옥 ‘춘곡의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집이다. 직접 설계한 집에서 그는 32세부터 72세까지 40년을 살았고, 중요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일제 강점기 경성의 북촌과 서촌은 미술가들의 주요 거점이었고, 이 곳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남았다.
근대미술을 연구해온 황정수가 쓴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유명 미술가들의 흥미로운 삶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 근대미술 태동기와 형성기의 생생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북촌 지역에 오래 살고 있는 저자는 산책길에서 고희동과 김은호가 살던 동네를 지나며 미술가들의 흔적을 접했고, 59꼭지의 책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서촌편’, ‘북촌편’으로 구성돼 있다. 독자들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에 있다해 이름 붙은 ‘북촌’과 ‘경복궁의 서쪽이 들어서 있다’해서 이름 붙은 ‘서촌’을 거닐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난다.
‘북촌편’에서는 한국적 인상파 화법을 완성한 오지호,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가 김기창, 한국 문인화의 정형을 정립한 장우성, 현대 건축의 산실 ‘공간’ 사옥을 설계한 김수근, 죽음으로 예술을 완성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또 화가들도 흠모했던 슈퍼스타 최승희, 매란방을 비롯해 근대 서화골동 매매 거리의 원조 인사동, 근대미술의 요람 중앙고보와 휘문고보 등 미술의 현장도 소개한다.
‘서촌편’에서 만나는 이중섭의 삶은 애틋하다.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중 서촌 누상동에서 지낸 1954년은 행복한 해였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고 제대로된 작업을 하던 그는 전시를 열어 성공하면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작업을 이어갔다.
또 세상과 불화한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였던 진명여고 졸업생 나혜석, 표지화에 능했던 팔방미인 정현웅, 언론인, 화가, 학자, 평론가였던 이여성과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군상’을 그린 이쾌대 형제, 만화가로도 이름을 떨친 동양화가 노수연, 깊은 우정을 나눈 두 천재 구봉웅과 이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또 인물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근대미술의 자존심이었던 서화협회, 현대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 인왕산, 한글 서예의 산실이던 배화여자 고등학교 등도 소개한다.
<푸른역사·북촌편 2만2000원, 서촌편 2만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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