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에 멀리 있다'는 뜻의 속리산···'제2금강'소금강'으로 불려
불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국보 팔상전·쌍사자 석등 눈길
그 절은 속리산(俗離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속리산은 그 절을 품고 있다. 바로 법주사(法住寺). 명산명찰이 다시없다. 그 산에 그 절이 있으니, 여느 곳과 비할 바 아니다. 묵직한 어감으로 다가오는 ‘법주’라는 말은 성근 빗발마저 물리친다. 법주사에 가는 여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말티 고개를 넘어야 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시소를 타는 기분이다. 산세에 보석처럼 박힌 명찰을 찾아가는 여정은 대체로 유사하다. 말티고개는 속리산 관문이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일설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하기 위해 냈다고 내려온다. 구절양장 열두 굽이는 차로 올라도 쉽지 않다. 그 옛날에는 오죽했으랴.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으나 사람이 산을 떠나네(山非離俗俗離山)”
속리산 자락에 들어서면서 고운(孤雲) 최치원(857~?)의 시가 떠오른다.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 삼최’로 꼽히는 문장가가 바로 최치원이다. 유교, 불교, 도교에 이해가 깊어 ‘계원필경’(桂苑筆耕)등 명문을 남겼던 최치원이 읊었다고 전해오는 시는 도와 삶의 본질을 묻는다.
법주사는 바로 속리산 품에 있다. 1970년 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예로부터 제 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 불렸다. 그만큼 경관이 빼어나다는 얘기지만, 산의 명칭이 더 이편을 잡아끈다. 속리(俗離)는 ‘속세에서 멀리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세속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마음에 문제일 터인데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하면서, 산을 떠나면 어떻고 산에 들면 어찌할 것인가.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에 걸쳐 있다. 그러나 일반에게는 보은 속리산으로 알려져 있다. 언급한대로 풍광이 아름다워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머문다. 가장 높은 천황봉(1058m)를 중심으로 관음봉과 비로봉, 문장대가 에둘러 있다.
‘법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법주사의 창건 유래는 이렇다. 때는 553년 신라 진흥왕 시절, 의신 화상이 인도에 유학을 갔다 돌아왔다. 그의 나귀에는 불경이 가득 실려 있었다. 구불구불 길을 올라 당도한 곳이 바로 이곳에서 멈췄다. 법주사가 자리한 곳이다. 그렇게 나귀가 싣고 온 ‘불법이 머문다’는 뜻은 바로 법주사의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법주사 홈페이지에는 창건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법주사는 신라시대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삼국유사’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를 창건한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 융종, 불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 때 진표 율사가 속리산에 가면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후세에 유포하라고 전한다.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감안하면 의신조사와 진표스님, 영심 스님 등이 창건과 중건에 관련돼 있다고 추정된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진표 스님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백제 지역 출신으로 한 종파를 이룬 그는 미륵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쌍사자 석등
“진표 스님은 의상 스님이나 원효 스님과 같은 고승들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편이지만 진표-영심-심지로 이어지는 계보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진표 스님 문도에 대한 비중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으며 ‘삼국유사’에서 진표 스님을 기술하는 데 할애한 지면의 양을 보아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수완,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조계종 출판사, 2020, 87~88쪽)
산사 안으로 들어서자 맑은 기운이 흐른다. 원시림이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마치 속리산이 숨을 몰아쉬는 것 같다.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와 수다한 생명들의 부산한 소리가 뒤섞닌다. 그러나 저잣거리가 아닌 산중인 탓에 소리는 적요에 수렴된다.
금강문을 지나자 저편에 천왕문이 보인다. 커다란 전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정밀하면서도 이색적인 풍경이다. 삼각형의 조형물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모습은 경이롭다. 오랜 세월 모진 삭풍을 견뎠을 전나무에선 현자의 기품이 느껴진다.
천왕문을 나오자, 눈앞의 풍경에 입이 벌어진다. 가로막고 선 것은 팔상전(국보 제55호)이다. 조금 전 보았던 전나무와는 다른 정교한 이미지가 배어나온다. 거대한 목탑은 오랜 유물의 아우라가 그러하듯, 베일이 쌓인 듯 신비를 자아낸다. 사실 팔상전은 탑이라기보다 불전(佛殿)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사리장엄구가 출토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리외함에 새겨진 문에 따르면 팔상전은 1605년 사명대사가 세워졌다.
알려진 대로 팔상전 명칭은 석가모니 일생과 관련이 있다. 부처 일생을 8개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전각이 바로 팔상전이다. 사찰에 들른 이들은 팔상도를 중심으로 탑돌이를 하면서 예불을 드린다.
팔상전을 보다 말고 또 한번 놀란다. 왼쪽에 솟아오르듯 서 있는 불상이 이편을 압도한다. 장엄한 불상은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불상은 8m의 기단 위에서, 인자한 눈으로 중생을 바라본다. 경내에 있는 모든 유물보다 도드라져 보인다.
이밖에 경내에는 국보 제5호인 쌍사자 석등을 비롯해 석련지(국보 제64호) 등 귀한 문화재가 있다. 천왕문 서쪽에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도 눈길을 끈다. 바로 옆에는 나귀를 끄는 인물의 모습을 부조한 것도 있다. 사람들은 경전을 싣고 돌아온 의신 스님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유구한 역사가, 아니 ‘불법이 머무는’ 법주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한다. 그렇게 1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현재에 당도해 있다. 비가 시작되려는지 구름이 빠르게 몰려온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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