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실감이 되는 요즘이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막히고 얼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세상살이도, 정치, 경제도 닫혔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지만, 이 봄에 스스로를 유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태백산맥문학관을 향해 가는 길, 미세먼지 때문인지 오락가락하는 가느다란 빗줄기 때문인지 착잡하다. 마음은 가라앉고 허전하다.
광주에서 벌교까지는 얼추 한 시간 남짓 거리. 이곳은 시리즈와 무관하게 수년 전 벌교를 오갈 때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모티브로 한 문학관이 들어선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그때 보았던 문학관의 잔상은 소설이 주는 무게만큼이나 다소 무거웠다.
흩날리는 빗줄기 탓인지 문학관 주위가 다소 흐릿해 보였다. 벽면의 벽화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둣하다. 우리 민족의 역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느낌이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서편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10권)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한다. 모든 소설의 첫 문장은 작가의 산고가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숱한 파지를 내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다. 조정래 작가 또한 그러하였다. 언젠가 그는 ‘원고지 첫 장을 쓰기 위해 무려 30여 장 가까운 파지를 낼 때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서사의 첫 머리를 쓰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뜻이다.
‘태백산맥’에는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대하소설이라는 이름처럼, 큰강이 유장하게 펼쳐지는 광경은 경이롭다. 인간의 군상은 마치 끝없이 대해를 향해 다투듯 달려 나가는 잔물결과 다를 바 없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멀리 스쳐 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장대한 여정은 그렇게 끝난다. 10권에 이르는 서사의 종점이 하나의 깊은 수묵화처럼 다가온다.
2008년 11월 21일 개관한 문학관에는 ‘태백산맥’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비치돼 있다. 연면적 1375㎡(415평) 규모로 이곳에는 육필 원고를 비롯한 159건 700여점이 전시돼 있다. 1층은 작가 조정래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 취재 수첩에 담긴 그림과 내용, 다양한 사진, 소설 속 장면을 형상화한 조형물, 출간 이후 신문 보도 내용 등이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 문학관에 전시된 1만66500장의 육필 원고가 시선을 압도한다. ‘혈서를 쓰듯’ 글을 썼을 작가의 고뇌가 읽혀진다. 취재수첩, 만년필, 카메라, 지팡이, 한복 정장 등에서는 작가의 체취를 읽을 수 있다.
“필사는 정독 중의 정독이다”라는 글귀가 붙은 필사본 전시관에는 작품을 필사했던 위승환, 김기호, 노영희 씨 등의 원고를 포함해 독자 필사본 23세트가 놓여 있다.
1층 통유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벽화는 압권이다. 높이 8m, 폭 81m의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 벽화는 소설이 상징하는 것만큼이나 웅장하면서도 다채롭다. 모두 4만여 개 몽돌로 제작한 옹석벽화는 지리산부터 백두산까지 몽돌을 수집해 만들었다. 민족의 염원이 투영된 벽화는 소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실답게 담아내고 있다.
‘태백산맥’은 1983년 집필을 시작해 1986년 10월 ‘제1부 한(恨)의 모닥불’ 1∼3권이 출간됐다. 이후 1989년 10월 ‘제4부 전쟁과 분단’ 8∼10권으로 완간됐다. 작가는 스스로가 만든 ‘글감옥’에 갇혀 소설 창작에만 매달렸다. 고통스럽지만, 황홀한 ‘글감옥’에 갇혀 작가는 치열한 창작의 사투를 벌였다.
소설에는 김범우, 염상구, 새끼무당 소화 등 270여 명이 등장한다. 크고 작은 사건들은 정치하게 엮여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그릇에 담겼다. 흔히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은 인물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는데 ‘태백산맥’을 읽고 나면 그 말의 의미가 새삼 실감된다.
벌교에는 소설 속 공간들이 남아 있다. 실재하는 공간은 상상력을 압도한다. 길을 걷노라면 어디선가 열차가 달리는 환청을 듣게 된다. 시커먼 철교는 소설 속 인물 염상구가 벌교를 접수하기 위해 깡패 왕초 땅벌과 담력을 벌였던 곳이다.
철교다리를 지나 걷다 보면 ‘소화다리’를 만날 수 있다. 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원래는 부용교(芙蓉橋)라 불렸다. 소화다리는 비극과 상처가 응집된 공간이다. 여순사건, 6·25의 격랑을 거치면서 양쪽의 세가 갈릴 때마다 총살형이 이루어졌다.
읍내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유사하게 복원한 건물도 있다. ‘보성여관’과 ‘벌교금융조합’(현 벌교농민상담소)에는 당시의 분위기가 감돈다. 원래 명칭보다 소설 속의 ‘남도여관’으로 알려진 보성여관은 당시 일본인들의 중심거리인 ‘본정통’에 있다. 2004년 12월 근대사적, 생활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등록문화재(제132호)로 지정됐다. 현재 보성여관은 문화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걸어 나오면 현부자집과 소화의 집을 만난다. 현부자집은 소설 첫머리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한옥과 일본식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새끼무당 소화는 무당인 어머니와 함께 살지만 정갈한 여인이다. 조직의 특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화의 집에 드나든다.
소화의 집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나무가 집을 굽어보는 형상이다. 금방이라도 헛기침을 하면 안에서 누군가 나올 것 같다.
빈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마치 옅은 안개가 앞을 가로막는 것도 같다. 이데올로기의 참상이 가장 격렬하고 슬프게 펼쳐졌던 벌교. 과연 그로부터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사람을 위한 역사로 전개되었는가. 과연 무엇을 위한 대립이며 누구를 위한 반목과 갈등이었을까.
조정래 작가는 문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비단 문학뿐이랴. 예술을 넘어 모든 사람살이의 근본은 바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데 있지 않을까.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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