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품은 건축물 열전 건축 도시의 미래가 되다
(18) 전남도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입구에 다다르자 낙후된 광양읍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던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멀리서도 심플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이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3개의 건물이 기차처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건물의 유리를 통해 비치는 청량한 하늘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거대한 캔버스를 연상케 한다.
이름하여 ‘자연을 담은 미술관’. 서울의 에스아이(SI)건축사무소와 광주의 (주)디아이지(DIG)건축 사무소는 지난 2016년 광양시가 실시한 전남도립미술관 건축설계공모에서 ‘전남의 풍경을 담다’라는 콘셉트로 14개의 경쟁업체들을 따돌리고 최종 선정됐다. 쇠락해가는 구도심과 미래지향적인 미술관이 하나로 이어져 광양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옛 폐선부지의 대지 조건을 살려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룬 건물 배치와 공간 활용계획이 돋보였다.
전남도립미술관은 공립미술관 다운 독보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4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옛 광양역사 일대 1만7465㎡ 부지에 지하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된 미술관은 전시실(지하 1층), 어린이아틀리에·북카페(1층), 대강의실·교육실(2층), 리셉션실·학예실(3층)로 구성돼 있다. 흥미로운 건 주요 전시장을 지하 1층에 집중 설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선 1층 로비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같은 번거로움(?)이 색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1층 한가운데 지하로 이어지는 전시장 입구는 하늘이 보이는 유리창과 화이트톤의 인테리어, 나무로 마감된 계단이 어우러져 관람객의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든다.
당초 전남도립미술관은 지난해 10월 개관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오는 3월 23일 공식 개관한다. 취재차 방문했던 날에는 개관을 한달 앞두고 막바지 준비작업으로 작품 설치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전시장의 면모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여느 미술관에서 보기 힘든 6m에 달하는 층고는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평면 회화뿐 아니라 초대형 현대미술작품도 전시가 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1년간의 기획을 거쳐 베일을 벗는 개관 기념전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 보다’(3월23일~8월8일)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전시주제는 풍수지리에서 주로 쓰이는 ‘배산임수’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초대 관장으로 임명된 이지호 관장(60·전 대전이응노미술관장)은 “남도의 지형적 특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배산임수인 것 같다”면서 “지역민들이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 보는 ‘좋은 곳’에서 예술을 감상하며 일상의 여유를 느끼게 하고 싶다”고 기획취지를 밝혔다. 실제로 미술관 내부에서는 선큰(sunken·지하나 지하로 통하는 개방된 공간) 공법으로 중정 테라스처럼 실내에서 바깥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미술관 건물이 주는 또 하나의 ‘배산임수’셈이다.
“이번 개관전은 수많은 거장을 배출한 예향의 위상에 걸맞게 전남의 미술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시리즈 전시입니다. 그 첫번째로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남종 문인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예술적 성취를 조명합니다. 하지만 자칫 남도의 전통에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세계의 흐름을 놓칠 수 있어 남도미술의 정체성을 미디어아트 등 현대적 해석으로 작업하는 국내외 작가들을 초대했습니다. 다양성, 개방성, 창의성을 모토로 도립미술관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색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전시는 ‘한국 수묵의 거장:의재와 남농’, ‘현대미술 대표작가’, ‘뉴미디어 작가’ 등 세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제1~9전시실과 중앙홀 등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현대미술 대표작가’에는 전통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프랑스의 고틀립(Baruch Gottlieb)을 비롯해 이이남, 허달재, 김진란, 조병연, 세오(재독 작가), 황인기, 장창익, 김선두가 참여하며 ‘뉴미디어작가’섹션에는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의 작품이 출품된다. 국경과 장르가 다양한 이들 작가들은 역사, 과거와 미래, 인간의 내면, 사회 비판 등을 스토리텔링한 작업에서 부터 21세기 현대미술의 글로벌한 흐름을 보여주는 그림, 영상, 설치, 소리 등을 선보인다.
개관전 이외에 도립미술관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건 바로 소장품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인 만큼 양적으로 다른 공립미술관과 비교할 수 없지만 남도 미술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 구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미술관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작품수집 추천위원회’와 ‘작품수집심의위원회’를 발족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 도립미술관이 수집한 작품은 총 139점. 이들 작품 구입에 들어간 예산만 57억 원에 달한다. 소치 허련의 ‘대나무 8폭’(수묵화)에서 부터 미산 허형의 ‘하경산수도’(1928년 작), 의재 허백련의 ‘대풍’(수묵화), 박행보의 ‘봄풍경’, 오지호의 ‘항구’(1966년), 김환기의 ‘I-1964’(1964년), 한묵의 ‘화려한 선회’(1986년), 양수아의 ‘무제’(1970년), 천경자의 ‘디즈니랜드’(1969년), 김창열의 ‘회귀’(2005년), 오승윤의 ‘초가을’(1997년), 오 윤의 ‘무제’(1974년), 황재형의 ‘등마루’(2004년), 이이남의 ‘만화병풍 I’(2018년), 임흥순의 ‘좋은 빛, 좋은 공기’(2018년) 등 다양하다. 앞으로 5년간 매년 3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컬렉션의 질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영국작가인 줄리안 오피의 설치작품 ‘워킹 인 런던’(Walking in London·2019년)과 프랑스 작가 자비에 베이앙의 조각작품 ‘새’(Bird·2018년)다. 미술관은 이들 컬렉션을 상설기획전 등을 통해 연중 공개할 예정이다.
이와함께 도립미술관은 지역민들의 작품 기증을 유도하는 데도 적극 앞장 선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구입에만 의존하면 컬렉션의 볼륨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그림이나 희귀자료 등을 기증 받아 미술관의 아카이브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관장은 “단순히 그림이나 자료를 기증받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 기증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미술관 1층에 ‘기증전시실’을 열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청년작가들을 위한 공간, 전시와 연계한 예술교육,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아뜰리에’ 등도 운영한다.
미술관 밖으로 나오면 확 트인 광장과 옛 광양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 2동이 나온다. 광양시는 도시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1개 동은 지역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 다른 건물은 카페 등 시민들의 편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광양=박진현 문화선임 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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