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피 끓는 명문
서재필 외 지음· 안대회 외 편역
우리 역사에서 1866년은 이후 우리 근대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을 촉발시켰던 의미 있는 해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이른바 신미양요는 강화도 조약은 물론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동학 농민 혁명 등으로 이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이 비로소 등장했지만 얼마 후 을사늑약을 매개로 국권을 상실한다. 이 즈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20세기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책으로 묶여졌다. 조선이 문명개화로 나아가기를 염원했던 문장은 한마디로 ‘대한 사람’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사’, 유길준의 ‘이루지 못한 김옥균의 꿈’,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등 39편을 모은 ‘근대의 피 끓는 명문’이 바로 그것.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 6명이 편역을 맡았다. 지난 2017년 전 9권이 완간 됐으며 이번 출간되는 책은 특별판으로 국문학, 한문학계의 연구 성과에 힘입었다.
엄정하게 선별하고 유려하게 번역한 이번 책은 조선 초 서거정의 ‘동문선’ 이후 최대 규모 산문 선집이라 할 수 있다. 서거정이 조선의 문운(文運)을 보이는 데 초점을 뒀다면 이번 책은 오늘을 사는 독자들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편역을 맡은 학자들은 “3·1운동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 국가 대한민국의 정문을 열어젖힌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를 기리는 동시에 남아 있던 아쉬움을 달래고자 백여 년 전후의 명문을 골라 현대의 문장으로 소개하였다”고 의미를 밝혔다.
또한 이들은 “대한 제국기 격랑의 근세사를 몸으로 겪은 대한 사람의 피 끓는 명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며 “‘대한 사람’의 시대정신이 글 한 편 한 편마다 약동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렇게 ‘한국산문선’의 별권을 낸다”고 덧붙였다.
당시의 명문을 보면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보게 되는 ‘음슴체’가 처음 ‘독립신문’에 등장한다. 서재필이 발간사를 쓸 때 가장 큰 고민은 문장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였다. 오늘날에는 명사형 종결형어미가 ‘-다’로 통일됐지만 전해오는 한문과 국한문 혼용체까지 겹쳐 ‘-하여, -건대, -이라’라 등 옛투가 주를 이루었다.
서재필은 고심 끝에 명사형 종결형을 택했다. “이 신문은 오직 조선만 위한다는 것을 알 것이요, 이 신문을 통해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것임.”이라는 ‘음슴체’가 눈에 띈다.
당시 글에는 요즘의 ‘헬조선’과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의 ‘헬조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하염은 ‘시급한 여자 교육’에서 “우리나라 현재의 참상을 따져 보면 그 원인은 여자를 교육하지 않은 데 있다”고 비판했다. 안경수는 ‘독립협회서’에서 “쓸데없는 겉치레가 너무 많고 쌓여 있는 폐단이 극심하다”고 지적했다.
1905년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은 오늘 읽어도 감동이 만만치 않다. 죽비와도 같은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것들은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공갈을 빙자한 위협에 겁먹어 우물쭈물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여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묘사직을 남에게 받들어 바치고 이천만 백성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두들겨 만들었다.” <민음사·2만2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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