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연극마을 30주년 기념 공연 ‘더 파더’ 리뷰
플로리앙 젤레르 희곡 ‘아버지’ 원작…앙드레 역에 오성완 출연
유령을 마주하는 공포와는 결 자체가 다르다. 존재를 뒤흔드는 ‘망각’ 앞에서 인간은 실존적 공포에 휩싸인다.
작중 알츠하이머를 앓는 80대 노인 앙드레는 혼란스러울 때마다 “지금 몇 시냐”고 묻는다.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가는 최악의 순간조차 그는 고작 시계를 볼 뿐이다. 마치 한 사람이 내지르는 마지막 절규처럼 들린다.
아마도 기억의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 때문인 것 같다. 앙드레의 편집증적 ‘시계 보기’는 영화 인셉션에서 현실구분이 모호해질 때 돌리던 팽이 토템처럼, 망각에 굴복되지 않으려는 최후의 결기로 읽혔다.
지난 23일 저녁 씨어터연바람에서 펼쳐진 ‘더 파더’는 망각하는 자와 주변인들의 고통을 그려낸 치밀한 심리극이었다. 종래의 극이 대부분 일정한 시간을 따라 전개되거나 역순행, 액자식, 이중액자 구성 등을 차용하던 구조였던 데 반해, 작품은 기억의 편린들을 교묘하게 뒤틀고 편집했다.
푸른연극마을 30주년 기념작으로 이 작품을 상연한 것은 나름의 의도가 있었던 듯 하다. 흥미와 가십에 기대 상업적 성공만을 쫓기보다, 다소 난해하더라도 예술성을 지향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했다’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택을 두고 전위극의 첨병 등의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는 다소 애매해보였다. 그럼에도 예술공연 위주의 상연은 지역극단으로서 ‘이립’(30년)이라는 결실을 맺은 추동력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연극은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 ‘아버지’를 극화한 것으로 2021년 영화 ‘더 파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앙드레 역에 푸른연극마을의 터줏대감 오성완이 출연했으며 안느 역은 이당금이 맡았다. 또 김영균은 사위 피에르, 김현경은 간병인 로라 역을 연기했다. 피에르와 로라가 가진 악인의 페르소나인 ‘한 남자’(김도현), ‘한 여자’(오새희)도 이목을 끄는 배역이다.
간병인 로라와 앙드레가 다투는 장면은 치매 가정의 안방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앙드레와 안느가 방백·독백으로 내면심리를 묘사하자 환자의 머릿속을 무대에 옮겨놓은 듯 했다. 실제로 관객 중 다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감상했다는 후문, 치매환자 가정을 미화하지 않고 극예술로 그려 비극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암전이 될 때마다 가구들의 위치는 계속 변한다. 서랍과 가구는 물론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패널마저 관객들에게조차 예고 없이 위치를 옮겨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모든 사건은 세트 변화 없이 노인의 아파트 안에서만 펼쳐짐에도 드라마는 역동적이다.
최소한의 무대만 갖춰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부각하려 했다는 점에서 모리스 메테를링크 작 ‘펠리아스와 멜리장드’(1892)나 폴 끌로델의 ‘마리아에게 전해진 소식’(1921) 등 상징주의 고전도 연상해 볼 수 있었다.
작중 앙드레의 목소리는 몽중몽 속 중얼거림, 또는 악한이 제 마음대로 쏘아붙이는 아우성처럼 객석에 울려 퍼진다. 온전한 기억을 잃어가는 자와 주변인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축제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앙드레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런던 이주와 요양병원 문제 등을 논의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도 자신을 속이려는 불한당들의 작당 모의로 들렸다.
결국 모든 극중 상황은 미궁을 남기고, 관객이 가늠할 수 있는 선에서 실마리를 제공한 채 마무리된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기억과 존재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자신마저 망각하는 ‘좌망(坐忘)’의 경지를 설파해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인간이 때로 건너야만 하는 ‘레테의 강’이 오히려 인간에게 망각의 기쁨이 될 수도 있겠다. ‘더 파더’의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앙드레의 절망 너머에 있는 망각의 의미를 좀 더 사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다.
공연은 2월 3일까지 씨어터연바람에서 열린다.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4시 30분.(월요일 휴무)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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