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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기자

“광주여고생들도 4·19 시위 참여했다”

by 광주일보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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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주도 졸업생들, 명예회복 위해 60여년만에 활동 사실 밝혀
광주여고동창회·개교 100주년 기념회, 참여자 ‘보훈 포상’ 신청
광주일보 1960년 4월24일자 ‘광여고생 200여명 참여’ 보도 확인

1960년 4월 19일 광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울타리를 부수고 (오른쪽) 시위대에 합류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과 더불어 광주 3대 민중항쟁으로 꼽히는 4·19혁명 시위 당시 광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정권 하야를 요구하며 1960년 4월 19일 교문을 박차고 시위에 나선 광주여고생들이 60여년 만에 자신의 활동 사실을 밝힌 것이다.

광주여고총동창회는 광주여고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광주여고와 함께 지난 14일 국가보훈처에 광주여고 11기 졸업생 3명에 대한 보훈 포상을 신청했다. 보훈 신청 대상자는 정찬선(80), 박덕자(83), 양사례(80)씨다.

총동창회는 광주여고 개교 100주년(1923년 4월 15일)을 기념해 명예회복과 제대로 된 역사평가를 위해 동문들의 연명을 받아 건의서와 함께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동안 광주·전남에서 4·19 관련 보훈 포상을 받은 이들은 광주고 13명, 조대부고 4명 등 총 22명으로 모두 남학생이었다.

광주여고 2학년생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정찬선씨는 “당시 사회상으로는 여자들이 시위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어서 60여년이 지나도록 밝히지 못했고 혹시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면서 이제서야 목소리를 낸 까닭을 설명했다.

특히 광주지역 4·19시위에서 남학생들만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잘못 인식돼 있는 점을 바로잡고 ‘광주여고 여학생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진실이 잊히면 안 된다는 동문들의 제안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5명의 광주여고생들이 주도적으로 4·19 시위를 조직했지만 이 중 한 명은 사망, 한 명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들은 3·15 의거에 참가했던 마산고 1학년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숨진 것을 계기로, 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를 막아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위 한 달여 전부터 광주고와 광주공고 학생들과 수차례 만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논의했다.

학동 증심사 부근에서 만난 이들은 다음달 시위를 계획했고 당일(1960년 4월 19일)에는 2교시 수업이 끝난 직후 종을 치며 학생들을 규합하기로 했다.

광주일보가 1960년 4월 24일 보도한 ‘시내학생 거의 합세, 광여고, 공고, 부고, 상고’라는 제목의 기사에도 광주여고 학생들의 가담이 확인된다.

기사에는‘(4월 19일 오후) 1시 20분 광여고 학생 200여명이 동편 판자울을 밀어 뜨리고 광고생과 합세하였다. 이때부터 데모는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임원인 독립운동가 고(故) 정우채(1911~1989)씨 딸인 정씨의 기억도 같았다. 다만 광주여고 참가인원은 200여명이 아니라 700여명이라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1960년 4월 19일 광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울타리를 부수고 (오른쪽) 시위대에 합류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정씨는 “2교시 수업이 끝나자 학교 밖에서 ‘광주여고 나온나’라는 소리를 듣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종을 치며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소리쳤다”면서 “울타리를 부수고 광주고 남학생들과 합세해 본격적인 데모에 나섰고 최루탄과 돌 등을 던지는 경찰에 맞섰다”고 말했다.

옛 전남도청으로 모인 수백명의 학생들은 “자유당은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두시간 가량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경찰의 최루탄을 피해 금남로에서 충장로로 이동했고 충장파출소에 돌을 던졌다. 이후 경찰을 피하려다 넘어져 미간에 돌이 찍히는 부상까지 입었다. 경찰서에 연행된 뒤로는 “다시는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경찰관에게 빰을 맞고 기합까지 당했다.

박씨 역시 시위 당시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사정 없이 굴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씨는 “젖은 몸을 이끌고 시위를 이어가던 중 충장로의 한 상인이 물기를 닦아주고 머리를 빗겨줬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급실장을 맡았던 양씨는 서울대 지망을 포기하고 전북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후 교사가 돼 30여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의 역사 선생님을 자처했다. 4월이 되면 누구보다 실감나게 4·19에 대해 설명했고 시위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줬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훈 신청을 하게 된 배경은 “개인의 명예가 아닌 학교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면서 “만약 60여 년 전 그날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이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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