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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칼럼7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광주 중국집의 김치 한국의 오래된 도시에는 유서 깊은 식당들이 있다. 그중에서 중국집의 존재도 뚜렷하다. 화교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반도에 들어와 살다가 1949년 중국에 인민공화국이 생기고 국교가 단절되면서 생겨난 구체적인 디아스포라다. 화교란 말 자체가 이주한 자를 뜻하는 ‘교’(僑)라는 한자를 쓴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화교의 주업이 포목점과 주물, 이발, 채소 재배,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에 선명한 중국집이다. 광주는 화교세가 꽤 셌다. 호남의 목포·군산·전주·익산과 함께 화교 학교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기초 교육을 감당했다. 인구가 충분하지 않으면 학교를 열 수 없었다. 화교는 광주에도 많은 중국집을 열었고 시대에 따라 명멸했다. 그중에서 시내에서 아직도 영업하면서 중국집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집들이 있다. 금남로에 .. 2022. 6. 4.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나물의 봄, 봄의 나물 장날도 아닌데 나물 장수들이 진을 치고 있다. 5월 초, 정선시장의 풍경이다. 정선은 대표적인 인구 노령화 지역이다. 인구가 줄고 이동이 줄면 기차역도 없어진다. 그래도 정선의 기차역이 건재한 것은 장날이 유명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오월 봄날의 장날은 나물 장날이다. 전국 어디든 나물이 지천인 계절인데, 강원도는 늘 주목받는다. 산지가 유독 많아서다. ‘나물=들과 산’이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있다. 이제는 많은 나물들을 채취에 그치지 않고 재배한다. 그래도 강원도의 산지는 산에서 뜯어 오는 나물을 많이 볼 수 있다. 딱 이맘때다. 시장 골목에 좌판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반갑다. 전국의 시장을 다니면 좌판은 거의 없어졌다. 손님이 없어서 정식 점포도 노는데, 좌판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이 .. 2022. 5. 7.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옛날 국수 공장을 가다 예전에 어느 오래된 국수 공장을 간 적이 있었다. 치렁치렁한 국숫발을 햇볕에 내다 말리는 광경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주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누가 요새 이런 국수 사 먹나요. 마트에 가면 싼 국수가 널렸는데.” 낡은 기계였다. 어린 시절에는 국수 가게가 동네마다 여럿 있었다. 아마도 경쟁도 했을 것이다. 어느 국수 가게가 더 맛있는지, 더 싼지 놓고. 이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가게다. 주인이 낡은 철물로 된 기계를 돌려서 밀가루 반죽을 해서 기계에 걸었다. 해소 기침하듯, 기계는 쿨럭이며 돌아갔다. “기계 부속을 구할 수 없어서 직접 깎아 만들거나 한다우. 이제 다 된 기계지.” 공장은 불량이 없어야 하고 생산성이 높아야 한다. 생산성 면에서 이런 가게는 할 말이 없다... 2022. 3. 13.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삼겹살은 왜 지역성이 없는가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북간도’를 쓴 안수길(1911~1977) 선생은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살았다. 그 시절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북간도’를 비롯한 여러 소설이다. 우리 민족의 북간도 이주는 일제강점기 타의에 의한 성격이 강했다. 조선시대 초기 이후로 사실상 국경이 정해지면서 만주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은 물론 다수의 상인과 여러 직업인들이 만주를 거쳐 갔다. 일제가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은 결국 붕괴되었지만, 만주는 당시 우리 민족과 여러 의미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만주에 남은 많은 동포들이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살아왔고, 이들이 근래 40년 정도 이어진 한-중 교류사의 주인공인 조선족으로 등.. 202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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