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5·18 그리고 나의 5월 <4>
‘고3 시위대’ 차종성·동생 종수씨
시민 구타하는 계엄군에 항의하다 감옥 간 형
45일만에 석방된 뒤 전남대 2년 재학 중 사망
종수씨 20년 직장생활 접고 5·18재단 입사
생존자 증언 수집 등 진상규명 활동 앞장
“5·18민주화운동을 함께 겪었던 광주 시민 모두가 제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5·18의 진상이 오롯이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뿐이죠.”
차종수(56) 5·18기념재단 연구소 팀장은 각종 5·18 왜곡과 폄훼 대응의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생존자 증언 수집, 전두환 미화 지우기, 암매장지 발굴 등 5·18 진상규명에는 차 팀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차 팀장의 이같은 열정에는 어린 시절 가족과 광주, 민주주의를 지키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형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차 팀장은 ‘고3 시위대’로 불리는 고(故) 차종성씨의 동생이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차 팀장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4살 터울의 맏형을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자랐다.
종성씨는 금호고 3학년이었던 지난 1980년 5월 19일 계림동에 있는 이모 집을 다녀오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시내버스를 타러 무등경기장에 갔다가 계엄군이 시민을 구타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한 것이다.
“왜 사람을 때리느냐”며 항의하던 종성씨는 계엄군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계엄군은 종성씨를 ‘폭도’로 몰아세우며 머리에 포대를 씌운 뒤 트럭에 태워 광주교도소로 끌고 갔다.
차 팀장은 “형이 갑자기 연락이 끊기자 어머니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형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며 “30일이 지나서야 교도소로부터 ‘차종성이 수감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면회도 자유롭지 않아 어머니조차 담임교사를 대동해야만 형을 볼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종성씨는 45일 동안 갇혀 고문과 구타를 당한 뒤, 면회 온 고등학교 담임이었던 한모 교사의 증언으로 석방됐다.
한 교사가 이후 1988년에 내놓은 진술에 따르면 면회 당시 종성씨는 “먹는 것도 그대로 좋고, 하루 한 번씩 목욕도 한다. 아픈 데도 없다”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감방으로 돌아가면서 다리를 절고, 한 팔로 허리를 짚는 등 아픈 모습을 보였다.
45일 만에 종성씨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다. 가슴이 답답하고 허리가 아파 잠을 못 이뤘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 탓에 집에서 한방치료만 받으며 버텼다. 그나마도 정보과 형사들이 24시간 내내 종성씨를 감시하고 있어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재수 끝에 1982년 전남대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한 종성씨는 단과대 학생회 간부를 맡고, 운동권인 탈춤 동아리에 들어가 집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그럴 때마다 시위 주동자로 몰려 경찰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1983년 2월 고문·구타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자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진단 결과 갈비뼈와 척추가 비틀려 있었고, 같은 해 3월 4일 전남대로 이송됐으나 이튿날 복막염으로 숨을 거뒀다.
차 팀장은 “어머니가 제일 충격이 크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4형제를 키우기 위해 매일 새벽 벽돌공장으로 출근해 막노동하며 돈을 벌던 와중에 큰아들을 떠나 보냈다”며 “어머니는 평생을 화병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지난해 돌아가실 때까지 형을 그리워하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만원씨가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을 가리켜 북한군 ‘광수’라고 도 넘은 왜곡을 시작하던 때였다.
차 팀장은 광주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광수’로 지목된 사람들을 찾아내 ‘북한군 개입설’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지씨 측의 대국민 보고회를 찾아가 동향을 파악하고, 인터넷 등에서 여과없이 퍼지는 왜곡에 일일이 대응했다.
왜곡에 앞장선 국회의원을 항의 방문했고, 박근혜정부 시절 교과서에서 5·18 관련 내용을 줄이려는 시도에 반발해 교육부에 반대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각종 5·18 관련 고소, 가처분, 재판에 참여하고 행방불명자를 찾아 암매장지 발굴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전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으로서 광주시민들의 증언과 목소리를 듣는 것도 차 팀장 역할이었다.
차 팀장은 “왜곡 대응과 진상규명에 힘쓰면서, 오히려 제가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마치 독버섯이 자라듯, 빠르고 무섭게 퍼지는 왜곡과 폄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가짜가 진짜가 되는 세상이 오게 된다”며 “5·18 왜곡을 완전히 뿌리 뽑는 날까지 진상규명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끝>
/글·사진=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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