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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은기자

고정희 화백 초대전 ‘연못의 이야기’ ‘노래하는 오월’ 등 40여점

by 광주일보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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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일 무등갤러리서
“80넘은 인생 그림은 생명” 
광주여성미술사 산증인

 

‘구름속에 희망’

86세 노(老)화가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들려온 건 ‘행복, 즐거움, 기쁨’ 이런 단어들이었다. 시종일관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어간 그는 매일 아침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는 게 너무도 행복하다고 했다. 80 넘은 인생을 살아오자면, 우여곡절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다. 그 역시 ‘그림’에 지탱하며 힘든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왔고,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세상과 이별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고정희 화백 초대전이 11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 거리 무등갤러리에서 열린다. 갤러리가 진행한 전시지원 공모에 선정돼 마련된 기획전으로 그의 11번째 개인전이다.

‘인생은 구름같아요’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모두 40여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최근작과 함께 1990년대부터 그의 화업을 돌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 골고루 나왔다.

올해 작업한 연작의 제목이기도 한 전시 주제는 코로나 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파트 창문 너머로, 습관처럼 구름을 바라보다 떠올렸다. 매일 매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며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구름을 볼 때 그게 ‘인생’ 같다는 생각을 했고 삶의 희로애락을 느꼈다.

‘인생은 구름 같아요’ 시리즈는 반추상 느낌의 작품이다. 자유롭게 표현된 구름의 형세는 리듬감과 율동감을 부여하고, 구름이 만들어내는 온갖 형상들은 화폭 위를 질주한다. 집안에 머무는 생활은 자연스레 삶을 돌아보게 했다. 백여개가 넘는 작은 원들을 무수히 그려넣은 ‘세월의 조각’은 행복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 좋았던 사람, 싫었던 만남 등을 떠올리며 삶을 반추한 작품이다.

고 화백의 작품에도 꽃과 풍경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평범한 소재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해 눈길을 끈다.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대상의 특질을 포착해 비구상의 느낌을 부여하며 색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이런 경향은 광주사범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추상화가 고(故) 강용운 화백의 영향이 컸다. 정형화된 규칙보다는 자유롭고 유연한 터치와 조형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려 늘 고민했다.

그림과 관련해 그의 마음에 남은 또 한 사람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천경자 화백이다. 당시 사범학교 교사로 학교앞 논두렁에서 그림을 그리던 천 화백은 곁에 쪼그려앉은 소녀에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느냐 묻고는, 광주사범학교에 가면 미술부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소녀의 마음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꿈을 이루었다.

고 화백의 작품에서 가장 개성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독특한 ‘색감’이다. 유화 물감을 쓰기는 하지만 두텁고 묵직한 느낌 대신,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도록을 받아들 때면 색감이 궁금해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노래하는 오월’, ‘아름다운 오월’, ‘연못의 이야기’ 등이 그런 경우다.

1997년 독일 개인전 당시 찾았던 카셀 도큐멘터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후 작업 방향을 고민하며 자신만의 색을 찾으려 노력했다.

고 화백에게 그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삶이 힘들 때 그는 동앗줄처럼 그림을 붙잡고, 마음을 다잡았다. 동명여중, 광주여고 등 여러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그는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상황이 되자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화업을 이어갔다.

그는 광주여성미술사(史)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힘든 여건 속에서 작업하는 동료들과 광주전남여성작가회를 꾸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후배들에게 거울이 된다.

2018년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후로는 그림 그리는 게 더욱 애틋해졌다. 몸은 예전같지 않지만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도 붓을 든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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