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암미술관, 17일~5월18일
“시대와 호흡하는 작품… 울림 오래갔으면”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소장품 전시
1981~2000년 민중미술작가 18명 작품 25점
송필용·한희원·하성흡 등 포함
“이 작품이 담양 그의 작업실 벽에 걸려 있는 걸 봤을 때 가슴이 뛰었어요. 그림이 나에게 강하게 육박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지하의 시 ‘황톳길’이 바로 떠올랐어요. 황톳길의 선연한 붉은 빛과 투박함이 그대로 보였거든요.”
그는 26년 전인 1994년 송필용의 ‘땅의 역사-남녘의 땅’을 처음 만났을 때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듯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시 ‘황톳길’의 한 대목을 읊으며 그는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갔다. 1994년, 일면식이 없던 송필용 작가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전주 아그배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잡혔는데 지원해 줄 수 있는 지 묻는 전화였다. 몇년 전 프랑스 살롱 드 도톤느에 참가한 그의 이력을 듣고 ‘대단한 친구’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일단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남녘의 땅’을 만난 그는 흔쾌히 전시 경비를 지원했고,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은암미술관 기획으로 열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민중畵, 민주花’(17일~5월18)전은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소장품으로 꾸민 ‘광주민중미술전’이라 할만하다. 전시작은 80여점의 민중미술 계열 소장품 중 지역 작가들이 가장 의미있게 활동했던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제작된, 8명의 작가의 25점을 김 고문이 가려 뽑은 것으로 도록에는 80여점을 모두 실었다. 김 고문의 전체 소장품은 서화 작품 등을 제외하고 300여점쯤 된다.
13일 전시장에서 그에게 작품에 담긴 스토리를 들으며 그림을 감상했다.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의 풍광을 담아온 작가들의 작품에는 ‘우리 시대’가 오롯이 담겨 있다. 오월 광주의 이야기도 있고, 묵묵히 살아가는 민초들의 건강한 삶도 있다. 작품 각각에는 그의 ‘사연’과 함께 작가와 나눈 ‘이야기’가 들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미지로만 접했던 몇몇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고, 무엇보다 전시장을 찾는 작가들 본인이 가장 감회에 젖을 것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0년 5월 윤상원과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그는 17일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이후 아내, 처제, 남동생, 여동생까지 5명이 체포되면서 아버지가 서점을 지켜야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는 현당 김한영을 찾아가 수묵을 배우며 마음을 다스렸고, 세월이 흘러 사업체를 운영하던 김 고문은 아버지를 위해 현당의 그림을 사기 시작하며 예술의 거리에서 그림과 만났다.
녹두서점에서 팔던 책에서 오윤의 판화 작품을 보고 ‘미술을 통해 시대정신을 보여줄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던 그는 홍성담의 5월 판화집 ‘새벽’ 출간에도 관여했다. 전남대 이태호 교수와의 만남은 그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이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들으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의 미’ 전집 24권을 독파하기도 했다. 10년 넘게 이 교수와 문화유산답사를 다니며 많은 민중미술 작가를 만났고, 본격적인 작품 구입도 그가 가 보길 청한 한희원 작가의 첫 개인전이 시작이었다. 그는 당시 ‘정미소’를 구입했다. 서화작품만 구입하던 그의 첫 소장품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한 작가의 ‘별 내리는 신창동’과 ‘배롱꽃 떨어지는 소리’두 작품이 나왔다.
“한 작가는 신창동 시리즈를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 블루톤이죠. 한데 이 그림은 차분한 느낌의 갈색 톤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줍니다. 언젠가 땅에 꽃잎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한 작가 작품을 보고 꼭 누군가의 넋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한 작가가 100호를 두 시간만에 그렸다고 해요. 땀에 흠뻑 젖은 줄도 모른채 말입니다. 바로 이번 전시작이죠. 이 교수와 답사를 함께 다니던 광주미술인공동체 사람들은 불로동 다리 넘어 일본식 건물에 모여 작업을 하곤 했어요. 곽재구 시인, 정희승·서미라 등등 많았죠.”
전시에는 따뜻한 느낌의 정희승 작가 작품 ‘불로동 다리’와 소박한 농촌 풍경을 그린 서미라 작가의 작품도 걸렸다. 또 황토와 먹으로 마감한 검은 화면에 붉은 닭의 모습이 인상적인 신창운의 ‘새벽’은 대학졸업전에서 마음에 들어 산 작품이다. 봉투 2개를 마련해 하나는 그림값으로, 하나는 학비에 보태라고 준 기억이 난다.
논둑에 앉아 막걸리 한잔에 담배를 피우는 농부가 등장하는 이사범의 ‘그림포기 농사포기’는 꼭 ‘그리다 만 그림처럼’ 보인다.
“그림 속 등장인물 중 한분이 자신의 형이라고 작가가 말하더군요. 한참 작품을 그리는데 우루과이 라운드 사태가 터졌고 농민들의 상심이 컸던 시절이죠. ‘우리 형님 농사 다 지었네’그런 생각이 들었고, 작가도 그림 그리길 멈춰 그리다 만 그림 그 자체가 작품이 된 거죠.”
신경호의 ‘당신의 창’은 박효선 연출가가 운영하던 민들레소극장 이전비 마련을 위해 홍성담 작가 등이 기획한 전시회에서 구입한 여러 작품 중 하나며 이준석의 ‘화엄광주’, 하성흡·박문종·손장섭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또 남의 물건까지 다 팔아주던 여수 시장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김경주 작가의 ‘점심’도 눈에 띈다.
전시에는 당시 민중미술작가는 아니었지만 민중미술의 사실정신을 담고 있는 박은용·유영열·주홍의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김 고문은 특히 수묵의 농담만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히 잡아낸 ‘파장’ 등 박은용의 작품에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장에 걸린 글 ‘화연(畵緣) 따라 30년’에서 김 고문은 “시대와 호흡하는 작품을 고르되, 회화적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것,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작품이 주는 울림이 깊고 오래가는 작품들을 구입했다”며 “전시작은 광주전남 민중미술 대표작이 아닌, 전적으로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나와 인연이 닿은 작품들”이라고 적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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