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관한 광주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 가보니
‘이주와 정착’, ‘항일정신과 문화운동’ 관련자료 전시
고려인 1·2세대 작가 육필희곡 등 국가지정기록물도
“강제이주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남은 건 절망뿐, 주동일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맨발로 피 흘리며 수없이 넘어졌다 일어서야 했다. 소련 정부의 거짓과 위선은 그동안 쌓아온 주동일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남편의 죽음과 강제이주를 체험한 주동일에게 스탈린 체제는 거짓으로 위장한 가혹한 압체제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고려인 한글 교육에 헌신했던 리상희·주동일 부부 이야기는 감동을 준다. 고려인문화관에 ‘선구자의 가슴에 흐르는 불멸의 사랑 노래’라는 주제로 마련된 전시실. 두 부부가 조국의 독립과 고려인들을 위해 모국어 교육에 헌신했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 의미와 국가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되묻는다.
최근 개관한 광주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광산구 산정공원로50번길 29). 이곳은 고려인의 강제이주와 항일운동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고려인들이 구소련 지역에서 남긴 다양한 자료와 컬렉션은 황무지에서 피워낸 민족혼을 상징한다.
문화관은 주택 밀집 지역에 위치한 터라 다소 번잡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초록색 건물이 주는 산뜻함은 주변의 풍경을 편안하면서도 밝게 물들인다. 모진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겨레의 얼을 잊지 않았던 고려인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사)고려인마을이 광산구청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한다. 당초 올해 초부터 업무를 시작했으나 코로나 팬데믹 등의 여파로 개관식이 미뤄져오다가 지난 5월 20일 세계인의 날에 맞춰 문을 열었다. 문화관이 자리한 월곡동은 고려인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이 거주하는,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광주 속 지구촌’이다.
문화관 관장은 지난 1991년 광주일보가 카자흐스탄에 세운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 김병학 고려인 연구가. 그는 “문화관은 강제 이주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도 민족혼을 피워낸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담아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향후 다양한 스토리와 콘텐츠가 축적된 융합의 플랫폼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입구에서 만나는 것은 이색적인 조형물이다. 고려인들이 1923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세운 ‘고려독립선언기념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정문에 부착돼 있다. 3·1만세운동 4주년을 맞아 현지 고려인들이 세운 건물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고려인 선조들의 얼이 배어 있다. 삼각형의 지붕에 걸린 태극기에선 고려인들의 긍지와 자부심, 반드시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문화관은 역사유물전시관 ‘숨결’과 주민소통방 ‘금결’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가 조상들의 항일정신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만남과 어우러짐을 뜻한다.
1층 전시실은 ‘이주와 정착’, ‘항일운동과 문화운동’, ‘강제 이주와 시련의 극복’을 주제로 꾸며져 있다. 눈에 띄는 사진은 당시 자발적으로 강제이주 열차를 탔던 보이찌크 교수와 5명의 이방인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학교 타민족교원 5명은 아끼던 제자들을 차마 버려둘 수 없어 자발적으로 열차에 올랐다.
그렇게 고려인들과 열차를 탄 이들은 사범대학장(유대인), 러시아어문학박사로 세계문학 및 문학원론을 강의했던 보이찌크 교수와 아내 러시아어 교수, 수학교수, 그리고 또 한 명의 교수였다. 마지막으로 함께 동승했던 러시아 처녀는 “나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준 백성은 고려인이다. 나도 당시들과 함께 가겠다”고 울먹이며 나섰다.
강제 이주와 정착에 관련된 자료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음의 글귀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이 마주한 땅은 온통 진펄과 갈밭과 소금밭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봄에 갈대를 베고 땅을 고르고 수로를 내어 메마른 땅에 물을 대고 볍씨를 뿌렸다. 어느 민족보다 농경에 우수했던 고려인들은 농사에 극히 비우호적인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푸른 옥토로 변모시켜나갔다.”
2층은 기획전시실과 국가지정기록물전시실, 특별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고려인의 역사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조명하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193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한국 최초 유일한 사범대학교였던 고려사범대학교 개교 90주년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이곳에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생물종의 변화역사를 다양한 삽화와 함께 제시하는 ‘생의 기원과 발전’이라는 책자 등이 비치돼 있다.
국가지정기록물전시실은 지난해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등재된 고려인 모국어 문화예술기록물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고려인 1, 2세대 작가들이 생산한 희곡, 소설, 가요집, 육필원고 21권과 고려극장 80여 년 역사가 담긴 사진첩 2권 등 총 23권은 연구 가치와 소장 가치가 큰 유물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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