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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기자

김철수 열사 30주기 추모제 “열사의 불꽃같은 삶·정신 기억하겠습니다”

by 광주일보 2021.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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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고 3학년 1991년 5·18행사서
‘노태우 정권 퇴진’ 외치며 분신
교내 추모공원 조성 동상 제막식

 

보성고 교정에 설치된 김철수 열사 추모 동상에 화환이 놓여 있다.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김철수 열사 병상 유언 중에서)

스스로를 불길로 내던지며 ‘참교육’ 뜻을 실현하고자 했던 고등학생 김철수 열사 30주기를 맞았다.

김 열사는 1991년 5월 18일 전남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참교육 실현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같은 해 6월 2일 2주만에 숨을 거뒀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김철수 열사

1973년 3월 보성에서 태어난 김 열사는 1989년 3월 보성고에 입학했다.

김 열사는 1988년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도 군사독재와 다를 것 없는 ‘공안정국’이 이어지는 걸 목격했다. 1990년 방송관계법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노동·민주화운동 탄압이 거세지던 때였다. 이에 반발해 분신과 시위가 빗발쳤던 1991년 4~6월은 ‘분신 정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 열사가 분신한 5·18 11주년 기념식에서는 강경대 열사의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 열사는 명지대 총학생회장 석방을 주장하다 ‘백골단’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해 숨을 거뒀다.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김 열사는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받지 마라”고 외쳤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김 열사는 “박승희 분신 이후 죽음을 각오했다. 우리나라 전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어나 투쟁해야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으나 분신 중 불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열사의 투혼은 광주에서 대중운동, 학생회 조직, 동아리 활동 보장 등을 이끌어냈다. 청소년 운동의 지평을 열고 단순 저항이 아닌 선도, 정책 제시로서 운동의 역할을 넓혔다는 평가다.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대표 한현우)는 지난 5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김 열사의 30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사업회는 김 열사가 분신한 5월 18일부터 숨을 거둔 6월 2일까지를 추모 주간으로 정하고, 보성고 교내에 추모공원을 명명하고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또 1회 김철수 열사 장학금 사업을 열고 김 열사 어머니가 직접 보성고 학생 2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추모사업회 관계자는 “김 열사는 사회적으로 죽임을 당한 고등학생”이라며 “열사의 불꽃 같았던 삶과 정신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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