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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기자

건축, 도시의 미래가 되다 [프롤로그]

by 광주일보 2020.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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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품은 건축물 열전] 일상으로 들어온 건축…도시를 살리는 좋은 건축은?

 

평소 지역의 미술관을 즐겨 찾는 지인 A씨는 2020년 새해를 맞아 제주도에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엔 예전의 방문 코스와 조금 달랐다. 서귀포 일대의 소문난 건축물들을 둘러 보기 위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가족들과 여행을 떠난 것이다. A씨 일행이 가장 먼저 들른 방문지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자리한 추사 기념관이었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추사 기념관 내부.

추사 김정희가 누명을 쓰고 귀양살이를 했던 초가와 인접한 곳으로, 대표작인 ‘세한도’에서 영감을 얻은 추념공간 등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추사 기념관 외관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높은 천장과 노출 콘크리트 벽체의 모습은 얼핏 양곡창고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세한도’에 등장하는 집 모양을 그대로 빌려와 고졸하게 지은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빈자의 미학’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승효상씨가 지난 2010년 설계한 기념관은 방문객들을 ‘그림’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은 듯한 감흥을 선사한다. 입구에서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전시를 둘러 본 다음 1층으로 올라가 화가 임옥상이 만든 추사 동상을 보고 나오는 간결한 동선이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장식이라고 해야 높은 벽면에 낸 둥그런 창문이 전부다. 하지만 이 곳을 통해 들어 오는 푸른 하늘은 말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다.

 

 

 

이들의 두번째 코스는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한 제주포도호텔이었다. 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호텔 외관은 객실 하나하나가 포도알 처럼 연결돼, 이름 그대로 포도송이를 닮았다. 제주의 전통 초가를 형상화한 지붕과 제주마을을 주제로 꾸며진 내부의 열린 창과 테라스는 자연풍경과 빛을 끌어들인다. 올레길을 따라 배치된 객실에는 제주의 원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건축가의 자연주의 철학이 스며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한 포도호텔 전경. 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은 포도송이를 연상케 하는 객실들을 연결해 독특한 건축미를 표현했다. <제주포도호텔 제공>

이처럼 서귀포의 건축물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아예 ‘서귀포시 건축문화기행’이라는 관광투어까지 등장했다. 건축이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다가오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 도시의 건축과 음식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동기이다.” 지난 2017년 국내에서 발간된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 ‘그때 그곳에서’의 한 구절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여행이란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 보게 하는 거울이라며 세계 각국의 도시와 건축물에 대해 소개했다.

 

사실 미술관과 갤러리, 도서관은 문화관광의 핫플레이스다. 특히 미술관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미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라는 점에서 색다른 여행을 꿈꾸는 관광객에겐 반드시 둘러봐야 할 필수코스가 됐다. 최근 문화애호가들을 중심으로 국내외 미술관과 도서관, 서점을 답사하는 문화기행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이유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의 전시장.


2년 전 취재차 둘러본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랜드마크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난 2015년 개관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이우환 공간(연면적 1400㎡)은 검정색 유리로 전면을 마감한 심플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설계 당시 이 화백은 건축가와 함께 전시장 기본설계에서부터 전시물배치, 주변 경관과의 조화, 조명의 각도까지 세심하게 챙겼다고 한다. 하얀 벽으로 채워진 건물 내부는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어 세계적 거장의 예술세계와 공간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한다.

이우환 공간은 개관과 동시에 국내외 미술계 인사에서부터 유치원 어린이까지 하루 평균 수백 여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떠올랐다. 또한 전국 각 대학 건축학과 학생들의 투어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이우환 공간의 작품을 잘 보존하기 위해 단체예약 대신 5∼10명 단위로 관람을 허용하는 등 지역의 문화브랜드로 키우고 있다.

 

광주로 눈을 돌려 본다. 유감스럽게 문화수도를 표방하고 있지만 도시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공공 건축물이 드물다.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건립하기 위해선 심의단계에서부터 디자인, 주변과의 조화 등을 고려해야 하지만 별다른 기준 없이 일반 건물과 마찬가지로 건축법 시행령, 국토교통부 건축위원회 심의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미적 감각이 요구되는 미술관, 도서관, 공연장의 건축물 심의과정에서도 도시의 이미지는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년 4월 완공 예정인 융복합 센터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플랫폼’(AMT)이나 올 연말 준공을 앞둔 서구 복합커뮤니티센터, 현재 설계공모중인 광주대표 시립도서관(옛 상무지구 소각장) 역시 자칫 색깔 없는 공공건축물이 되고 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근래 광주의 도심을 둘러본 이들은 대부분 칙칙한 건물과 여백을 찾기 힘든 간판들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도심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추진되고 있는 재개발·재건축 공사 현장은 공포감 마저 느끼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 2018년 말 기준 30층 이상 고층건축물이 26곳에 170개동이 있으며, 이 가운데 아파트가 22곳 160개동에 달한다. 현재 재개발·재건축 등을 통해 건립중이거나 건축허가를 받은 아파트 상당수가 30층 이상이라고 하니 ‘아파트 공화국’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 고층 아파트들이 모두 ‘성냥갑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공공 건축물이나 도시 경관 역시 ‘무채색’이 대부분이다. 몇년 전 도시의 랜드마크를 표방하며 광주의 관문인 광천동 터미널 앞에 건립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그런 경우다.

여기에는 지난 2005년 이후 제1회 디자인비엔날레와 2018년 국제도시 디자인 포럼 등 빅 이벤트를 공공디자인과 연계하지 못한 광주시의 안일한 행정 탓이 크다. 지난 2000년 이후 서울, 부산, 영주 등 타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공공디자인을 화두로 삼은 것과 다른 행보를 보인 것도 한 원인이다.

아름다운 건축물은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소중한 자원이다. 게다가 건물은 한번 짓고 나면 되돌리기 어려운 만큼 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젠 건축심의 단계에서 디자인, 조경 등을 꼼꼼히 따지는 광주만의 특색있는 ‘건축학개론’이 필요하다.

한 도시의 품격은 화려한 고층건물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미적 감각이 가미된 건축물, 정체성 있는 간판, 시내버스 정류장이나 길거리의 쓰레기통까지 ‘생활 속 디자인’들이 어우러질 때 더욱 빛난다. 이에 본 시리즈는 문화도시의 위상에 걸맞은 건축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독특한 컨셉과 미감으로 도시를 살리는 현장들을 둘러보고자 한다. 건축은 도시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자 자산이기 때문이다.

 

 /제주=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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