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품은 건축물 열전 건축 도시의 미래가 되다 (21)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미술관에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은은한 조명과 깔끔한 분위기가 감도는 여느 전시장과 달리 비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늘어선 작품들이 생경스럽다. 순간, ‘미술관이 맞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철제로 만든 선반 위에 조각 작품들이 나란히 쌓여 있고 바닥 곳곳에도 대형 설치 작품들이 놓여 있다. 특별한 동선도 없어 관람객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돌아 다니며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한다.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
지난 2018년 12월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국내 미술계를 향해 내세운 슬로건이다. 말 그대로 미술관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컬렉션을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내보이는 독특한 콘셉트다. 일명 ‘속이 보이는’ 미술관은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희소성으로 개관과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개관 1년 만에 21만 명이 다녀간 것만 봐도 ‘열린 미술관’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뉴스 메이커’로 떠오른 데에는 공간의 변신이 있다. 퀴퀴한 담배공장에서 화려한 문화 발전소로 환골탈태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1946년 청주 내덕동에 설립된 연초제조창은 한때 청주를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근로자 2000명이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하던 국내 최대 규모의 담배공장이었다. 하지만 금연인구의 증가로 담배산업이 위축되면서 2004년 70년 만에 가동을 멈추자 일대는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철거냐, 재개발이냐. 도심의 애물단지 신세였던 옛 연초제조창의 활용 방안을 놓고 지역사회의 반응은 크게 갈렸다. 오랜 공론화 과정 끝에 청주시가 선택한 카드는 ‘리모델링’이었다. 철거나 재개발 보다는 시민들과 동고동락해온 공장을 다시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청주시는 담배공장을 매입한 뒤 2007년 부터 문화단지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청주공예비엔날레의 ‘효과’가 큰 몫을 했다. 지난 1999년 창설된 청주공예비엔날레를 통해 미적 안목과 문화 마인드를 높인 시민들이 예술의 힘에 주목한 것이다.
지난 2011년에는 청주예술의 전당 일원에서 진행하던 청주공예비엔날레를 옛 연초제조창으로 무대를 옮겨 문화산업단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전국 각지에서 청주를 찾은 관람객들은 옛 담배공장을 예술로 부활 시킨 ‘아트 팩토리’에 탄성을 터뜨렸다. 이같은 반응에 고무된 청주시는 마침 수장고 부족을 겪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수장고형 미술관’이라는 흥미로운 제안을 건넸다. 정부는 청주공예비엔날레를 통해 부활한 옛 연초제조창이 도시 재생의 성공 모델로 부상하자 청주시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공사비 577억 원을 지원했다. 당초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품 1만1000여 점을 소장하는 수장 보존센터로 건립될 예정이었지만 시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해 청주시가 전시·교육 공간을 포함 시키면서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청주관의 색깔을 엿볼 수 곳은 바로 1층 개방형 수장고다. 관람객들이 전시장이 아닌 미술관의 수장고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다. 보통 외부 환경에 민감한 미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수장고의 특성상 온도와 습도, 빛에 덜 예민한 조각, 설치작품들이 주로 자리하고 있다. 마치 창고형 마트의 물건처럼 층층히 놓인 작품들이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2층의 ‘보이는 수장고’는 수장고 내부에 전시된 작품을 유리 너머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니키 드 생팔의 ‘검은 나나’, 이불의 ‘사이보그 W5’, 서도호의 ‘바닥’, 백남준의 ‘데카르트’, 장 드 뷔페의 ‘집 지키는 개’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3층은 정부가 미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시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해 미술작품을 대여해 주는 ‘미술은행’ 소장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개방형 수장고와 보이는 수장고 두 가지 형태로 운영중이며 미술품의 전문적인 보존 처리, 검사 과정은 ‘보이는 보존 과학실’에서 공개한다. 4층 특별 수장고는 원래 연구용으로 쓰이는 공간으로 실제 수장고와 가장 유사한 형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한 수장고로, 김정숙(1917-1991), 임응식(1912-2001), 한기석(1930-2011), 황규백(1932- )의 작품 약 800점이 소장돼 있다.
5층 기획 전시실은 누구나 상상하는, 일반적인 전시장 풍경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우향(雨鄕) 박래현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 통역자’ 전시가 한창이다. 20세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인 박래현은 생전 여성이란 이유로 미술계로부터 예술세계를 조명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나눠 청주관의 전시공간에 맞춰 압축적으로 풀어냈다. 우향의 일상과 예술을 담은 영상을 먼저 접하고, 이후 전시실에서 직접 작품을 감상하는 구성이다. 전시장 곳곳에 비치된 기고문(수필) 한글 복제본과 문구를 병치시켜 마치 태피스트리의 들실과 날실 처럼 엮이고 짜내려간 그녀의 삶과 예술의 여정을 따라 가도록 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청주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김기창 화백의 ‘화가 난 우향’(1960년대)을 비롯해 지역 작가와 청주시민들과의 호흡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박래현과 김기창의 삶과 예술이 깃든 청주에서 우향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청주는 우향의 삶과 예술이 잠들어 있는 뜻깊은 곳이다. 평생 삶과 예술의 여정을 함께 했던 운보 김기창 화백은 우향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운보의 집’을 짓고 아내와의 추억을 기리며 여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오는 5월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회화, 판화 등 104점의 작품과 자료 18점이 공개된다.
또한 청주관은 미술관의 정체성을 살린 다양한 기획전으로 전국의 미술애호가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지난해 열린 ‘보존과학자 C의 하루’(Conservator C’s Day)가 대표적인 전시다. 전시 제목의 ‘C’는 보존과학자를 의미하는 ‘컨서베이터’(Conservator), ‘청주’(Cheongju)의 ‘C’, 현대미술을 뜻하는 ‘Contemporary art’를 뜻하며 동시에 삼인칭 대명사 ‘-씨’를 의미한다. 평소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든 미술품의 보존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색적인 기획이다. 미술작품의 탄생 순간부터 환경적, 물리적 영향으로 변화와 손상을 거쳐 보존과학자의 손길을 거쳐 다시 생명을 얻는 과정을 한편의 파노라마 처럼 담아냈다.
이처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빼어난 건축미를 뽐내는 여타 미술관과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폐산업 유산도 차별화된 콘셉트로 리모델링한다면 도시의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청주관 개관 이후 미술관은 물론 주변 일대의 유동 인구가 늘어면서 청주는 문화도시로 옷을 갈아 입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2019년 문화제조창C(청주시 청원구 상당로 314번지 일대)가 완공된 이후 청주관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2030 세대의 문화아지트로 떠올랐다. 잘 만든 미술관 하나가 청주의 미래를 바꾼 것이다.
/청주=박진현 문화선임 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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