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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이덕일의 ‘역사의 창’] 독립선언과 독립청원

by 광주일보 2021.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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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봉기하려던 거사는 당초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개신교계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계의 움직임이다.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기본 원칙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기한 14개조의 평화원칙이었다. 그중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전해지면서 일제강점기의 한국 개신교계는 크게 고무되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의 개신교계에 복음처럼 받아들여졌다.

 

이 원칙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지, 승전국의 일원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는 해당하지 않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성향의 한국 개신교도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고무되어 거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개신교계는 독립선언이 아니라 독립청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은 의미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실상은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독립선언의 주체는 선언을 하는 당사자 즉 우리 민족이지만, 독립청원은 청원을 받는 당사자 즉 일본이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천도교계는 처음부터 독립청원이 아니라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개신교계가 독립청원을 하기로 한 사실을 알고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마침내 개신교계는 이에 동의했다. 개신교계의 이승훈·함태영 등은 2월 22일경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동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을 선언한다”고 합의했다. 일제의 ‘손병희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천도교 측에서 이때 5000원의 거사 자금을 기독교 측에 제공했다. 기독교계는 대부분 서북 지역 사람들로서 일시 서울에 왔는데, 독립청원을 선언으로 바꾸려면 조율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경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천도교계에서 보조해 준 것이었다.

 

천도교는 불교계도 참여시키기 위해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던 한용운과 백용성을 합류시켰다. 유림도 참여시키기 위해 곽종석 등과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북 성주의 김창숙과 접촉했다.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고종 인산일에 거사하려 한다는 편지를 받았지만 모친의 병환 때문에 2월 그믐에야 서울에 올라오니 이미 때가 늦었다고 회고했다. 김창숙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지금 광복운동을 전개하는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통탄했다. 이어 전국 유림 134명 명의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파리평화회의에 전달하는 ‘파리장서 사건’(1919년 4월)을 일으켰다.

3·1독립선언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면서 일제에 순응적이었던 천주교계를 제외한 주요 종교인들이 ‘민족’이란 기치 아래 하나가 된 거사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개신교인들이 천도교도 및 불교도와 하나가 되어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민족대표 33인 중에 개신교계는 16인으로 2인의 불교계는 물론 15인의 천도교계보다도 더 많았다. 당시 개신교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약 1.1~1.3% 정도로 추측하니 20여 만 명에 불과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 수는 967만여 명으로 당시보다 50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20여 만 명에 불과했던 1920년경에는 개신교가 타 종교인들로부터도 ‘민족종교’로 대접받았지만 지금도 그런 대접을 받는지는 의문이다.

한국 개신교는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와 함께 하면서 물질적으로는 급속한 팽창을 이뤘지만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쇠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도교계의 설득에 독립청원을 독립선언으로 바꿀 정도로 타 종교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개방성과 상대성의 회복이 역설적으로 한국 개신교계의 영적 지도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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