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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길목 석주관에 올라 왜적 막아선 ‘구례 7의사’

by 광주일보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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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호남 의병 이야기 <3> 임란 의병장, 그들의 거병과 최후 ②  

 

제봉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 의병청을 설치한 후 의병을 모았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 최상중, 양사위, 양회적, 박광옥, 김덕홍, 이대윤, 양산숙, 곽현 등이 찾아가 합류했으며, 고경명은 전라좌도의병대장으로 추대됐다. 6월 1일 출사표를 작성해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 전했으며, 6월 9일 격문을 돌리고 6월 11일 6000여 명에 이르는 의병과 함께 출정했다.

 

보성 출신인 삼도 임계영(70세에 사망)은 48세의 늦은 나이에 별시문과에 급제해 3년간 경북 진보현감으로 재직하다 초야에 묻혀 병법과 무예를 공부했다. 64세의 나이에 임란이 발발하자 “내 죽을 바를 얻었도다”라며 1592년 7월 20일 거병해 전라좌도의병장에 올랐다. 경북 성주성을 수복하는 등 영남 일대 왜적들을 소탕했으며, 1594년 4월 김덕령의 충용군에게 의병을 넘겨주고 귀향했다. 1597년 10월 27일 화순 모후산 유마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탄 변사정(67)은 남원 출신으로 군량미와 무기를 모으는 의곡청을 설치해 고경명, 김천일 등을 지원했다. 1592년 7월 고경명 사망 소식을 듣고 64세의 나이에 거병하자 양사위, 정소, 양추, 김득지 등 2000여명이 찾아왔다. 임계영, 최경회 등을 도와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지켰으며, 1595년 10월 23일 남원성에서 고령으로 숨졌다. 괴정 최시망(60)은 나주 출신으로 1592년 10월 거병해 홍민성, 홍민언 등과 1000여 명을 조련시킨 뒤 1593년 3월 남원 인근 여원치에서 왜적 208명을 사살했다. 경남 함양에 왜적의 기습을 받아 허벅지에 총탄을 맞은 뒤 부하들에게 군사를 넘겨주고 귀향했다.

왕득인 등 7의사는 모두 구례 출신이며, 석주관 전투와 연관이 있다. 석주관은 호남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임란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다. 1556년 태어난 왕득인(41)은 임란이 발발하자 관군을 도와 석주관을 지켰다. 하지만 1597년 8월 6일 호남 침공을 위해 왜적들이 대거 몰려와 관군이 참패하자 아들 왕의성과 가족들을 피난시킨 뒤 거병했다. 400여 명의 의병과 석주관을 막아서자 병참로가 막힌 왜적은 다시 2000여 명을 파견했고, 바위와 통나무로 조총, 화포를 든 왜적에 맞섰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왕득인은 북향재배한 뒤 왜적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구례 함락과 함께 왜군이 잔인하게 약탈·방화를 자행했으며,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1597년 10월 1일 ‘복수군’을 편성하자 구례의 이정익, 오종, 고정철, 양응록, 한호성 등이 참여했다. 이들을 모두 합쳐 ‘7의사’라고 한다. 화엄사의 스님 153명, 쌀 103석의 지원을 받은 1000여 명의 의병은 1598년 봄 1만여명의 왜적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왕의성을 제외한 5명이 모두 한 자리에서 전사했다. 총탄에 맞아 기절한 왕의성은 깨어난 뒤 병자호란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보성 출신 의병장 최대성(45)은 33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옥포, 합포, 적진포, 한산, 안골포, 당포, 부산포 등의 해전에 참전했다. 부친상으로 귀향한 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2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순천, 광양, 보성 등 전남 해안선을 따라 왜적을 물리쳤다. 1598년 6월 8일 왜적의 복병을 만나 조총을 맞고 순절했다. 강진 출신 의병장 염걸(53)은 1592년 9월 300여 명의 장병을 모아 강진 구십포로 상륙을 기도하는 왜적을 무찔렀다. 이순신 장군과 공동작전을 펴기도 했으며, 이 장군의 아들 면을 죽인 왜장을 포로로 잡아 이 장군에게 넘기기도 했다. 1598년 11월 18일 거제도까지 왜적을 추적하다 수적인 열세로 동생,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담양 추성관 내 고경명기념관에는 당시 참여한 의병장들의 이름을 적은 띠가 걸려 있다.

 

장성 출신 의병장 김경수(78)는 임란이 발발한 뒤 고경명에게 의병, 쌀, 화살 등을 보냈으나 고경명이 숨지자 준비를 거쳐 1592년 11월 9일 거병했다. 의병장에는 전투 경험이 있는 김제민을 추대하고 자신은 맹주가 돼 군량과 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아들 김극후, 김극순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정유재란에도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거병해 왜적을 무찔렀다. 송제민(53)은 담양 출신이며, 임란이 발발하자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임했다. 고경명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모아 뒷수습을 하고 경기, 호서, 호남을 잇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93년 11월에는 상중인 김덕령을 찾아가 거병을 권유하고 제주도까지 찾아가 말 30필을 구해 건네는 등 7년간 전장을 지켰다. 광주 광산 출신인 김세근(42)은 1592년 6월 17일 이대연, 박춘경, 정화성 등과 거병해 7월 9일 금산에서 고경명 의병에 합류했다. 금산성 탈환을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7월 10일 전사했다. 임환(47)은 나주 출신으로 유명한 문장가 임제의 동생이다. 임란이 발발하자 김천일 의병에서 종사관으로 참여했다. 강화도에 들어가 해로를 열어 서울의 왜적들을 기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몸이 아파 잠시 귀향했다가 정유재란에 다시 유지경, 진경문, 오정남 등과 거병해 순천, 광양 등에서 왜적과 맞섰다.

광주 광산에서 태어난 충민공 양산숙(32)은 동생 산룡과 함께 김천일 의병에 가담해 종사관으로 나섰다. 김천일의 명으로, 의주행재소에 있는 선조를 만나 국토수복을 위한 계획을 건의했으며, 서울에서 왕실묘를 파헤치는 왜적을 막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뒷날을 기약하라는 김천일에게 “의리로 그럴 수는 없다”며 자결했다. 충경공 이정란(71)은 전주 출신으로, 64세의 나이로 의병청을 설치해 500여 명의 장정을 모아 전주성을 지켰다. 1592년 7월 계속되는 왜적의 공격을 견뎌내고 기습 공격에 나서 왜적을 무찔렀다. 서울에서 태어난 심우신(49)은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다 임란이 발발하자 처가인 영광에서 거병했다. 처남 임두춘, 정충훈, 김부행, 최인, 박언준, 김보원 등이 호응해 1000여 명을 모아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금강에 상륙, 1592년 12월 8일 수원 독성산성으로 들어가 전라도순찰사 권율 등과 만났다.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적을 뒤쫓아 남하하다가 진주성으로 입성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담양 추성관 현판.

 

곡성 출신 의병장 유팽로(28)는 임란이 발발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해 1592년 4월 21일 500여 의병을 모아 조련한 뒤 전북 임실 등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이후 남원의 양대박과 합해 800여 명을 데리고 고경명 의병에 합류해 한양 수복을 위해 북진했다.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피신하라”는 고경명의 말에 “주장을 버리고 살길을 찾을 수는 없다”며 항전하다 전사했다. 충장공 양대박(49)은 남원 출신이며, 임란이 발발하자 담양에서 고경명 의병에 참여했다. 남원에서 1500여 명의 결사대를 선발해 1592년 6월 24일 고경명과 합세하기 위해 북진하다 전북 임실에서 왜적을 만나 50여 명을 사살하고 1000여 명을 무찔렀다. 전주에서 고경명과 만났으나 병세가 갑자기 심해지면서 7월 7월 막사에서 숨졌다. 그는 최초로 왜적과 싸워 승리한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광주 출신인 범기생(40)은 김천일, 고경명 등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하고 우선 광주에서 수 백명을 모아 나주에 의병청을 설치한 김천일 의병에 합류했다. 서울 양회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1593년 4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적을 쫓으며 “한산 달에 칼을 씻고 한수 바람에 배를 매니 장부로서 적을 쫓는 일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시를 남겼다. 남하해 진주성에 입성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남강에 투신했다. 홍민언(89)·홍민성(90) 형제는 사촌간으로 나주 출신이다. 홍민언은 담양의 고경명에게 우선 군량을 보낸 뒤 고경명, 조헌 등이 잇따라 전사하자 1592년 8월 15일 홍민성과 함께 500여 명을 이끌고 북진하다가 전북 남원에서 진주성으로 가던 왜적과 싸워 승리했다. 이후 민언은 부친 병수발을 위해 먼저 귀향하고, 진주성에 입성한 민성은 과로로 온 몸에 마비가 와 나주로 돌아왔다. 같은 해 7월 12일 남평 드들강을 건너오는 왜적 300여 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광주 광산 출신인 기효증(66)은 대학자 기대승의 큰아들로, 담양과 나주에서 거병한 김천일을 위해 나주에 의곡청을 설치해 선조가 있는 의주행재소와 의병들에게 군량을 보내는 일을 맡았다. 1592년 6월 29일부터 3000여석의 군량과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11월 1일 군산을 출발했다. 이후 함포, 강화도, 평안도를 거쳐 1593년 2월 1일 3개월만에 의주에 도착해 선조에게 의곡 3200석, 콩 50석, 조 50석, 의병 460명을 헌납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알려드립니다]

광주일보 2021년 1월 29일자 22면 ‘신의병열전 1. 임란 의병장, 그들의 거병과 최후 ①’의 “원개·영개·형개·홍개 등 네 아들과 조카 희개 등은”이라는 표현에서 이들은 임계영의 전라좌도의병에 참여한 풍암 문위세의 네 아들과 조카임을 밝혀둡니다. 남평 문씨 문중에서 이 같이 지적해 바로 잡습니다.

목천 장씨 대종회에서 충의공 장윤 장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알려와 그의 공적을 요약합니다. 순천 출신인 장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해 순천 수성장으로 있다가 임란이 발발하자 전라좌도의병장 임계영 의병군에 합류, 제3차 성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진주성에 입성했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정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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