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미술관 ‘배동신·양수아-100년의 유산’전 <상> 양수아 화백
2020년은 호남 서양화단의 주요 인물인 배동신(1920~2008), 양수아(1920~1972)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전승보)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광주가 낳은 천재 수채화가 배동신과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양수아가 남긴 100년의 미술사적 유산을 조명하는 전시를 마련했다. 두 사람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 등을 만나는 ‘배동신·배수아-100년의 유산’전은 2021년 4월 18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제5~6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들의 작품 세계를 2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역사의 격량 속에 침몰한 낭만적 참여주의자’(이석우 경희대 교수), ‘굴레를 초월한 절대 자유의 염원’(장석원 전남대 교수)
“아버지는 마지막 낭만주의자셨던 것 같습니다. 예술을 위한 인생을 사신거죠. 아버지는 굴곡진 삶의 응어리들을 추상작품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으셨을 겁니다. 그렇게 즐겨 드셨던 술은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구요.”
지난 24일 고(故) 양수아(1920~1972)화백 아카이브전을 함께 둘러본 아들 양승찬 나인갤러리 관장은 아버지의 지난했던 삶을 들려주며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양 관장은 “아버지 작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시고,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5남매를 키운 어머니께서 올 4월 돌아가셨다”며 “100주년전을 꼭 보여드린다고 했는데, 결국 못 보고 가신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시실 한 가운데 낡은 화구가 놓여 있다. 붉은 녹이 슬고 굳어버린 물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팔레트와 붓. 이미 세상을 떠난 지 48년이 된 한 작가의 예술혼이 담긴 물건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광주시립미술관이 주최한 ‘100년의 유산-양수아’전에는 구상, 비구상 작품을 비롯해 드로잉, 사진, 삽화, 인터뷰 자료 등이 나왔다. 1940년대 스케치 작품부터 시작해 ‘강강수월래’ 등 구상 작품과 아내를 모델로 삼은 ‘재봉틀질 하는 여자’, 다양한 자화상 등은 그의 초기 작품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무엇보다 구상 예술이 지배적이었던 지역 화단에서 꿋꿋이 이어갔던 다채로운 추상 작품들은 그 변화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1920년 보성에서 태어난 양 화백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와 함께 굴러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해방 후 일본인 아내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좌우익 싸움으로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잃고 6·25 당시 지리산에 빨치산으로 입산, 이후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 ‘빨치산 화가’로 등장하기도 한다. 줄곧 ‘반공’의 굴레에 갇혀 감시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
양 화백은 한국추상미술의 선두에 선 혁신가였다. 한국 중앙 화단에 앵포르멜 운동이 전개된 1957년에 앞서 이미 비구상의 세계를 선보여온 그의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양 화백은 삶의 응어리를, 시대의 아픔을 풍경화 등 구상 작품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양 화백의 오랜 후원자로 추상미술에 비판적이었던 오지호 화백도 “양수아는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 물감을 흩뿌리고 초현실적인 그림을 광주에서 그렸다는 사실이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간 그림이었다고 할까요. 고정화된 기본 개념을 없애고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무정형의 그림들을 그리셨습니다. 얼핏 카오스처럼 얽히고 설킨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질서가 존재해요. 탄탄한 데셍의 바탕 위에서 그려진 그림들입니다.”(양 관장)
삶과 완벽히 떨어질 수는 없었던 그는 정말 돈이 필요할 때면 구상 작품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위조 지폐를 그리고 있다. 즐거워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호남 추상회화의 씨를 뿌린 그는 광주사범학교 미술 교사 시절 지금은 쟁쟁한 예술가들이 된 제자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황영성·우제길·최재창 화백 등이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전시실에서 만나는 인터뷰에서 그들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선생님을 추억한다.
“미술실에서 사과나 복숭아를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겉을 그리지 말고 속을 그리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새콤하고 달콤한 맛을 그려야 한다는 거죠. 1960년대 초엔 참 충격적인 이야기였죠.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게 정석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최재창)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예술가의 자유스러움’이 넘쳤던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최재창 화백은 물감 선물하며 어려웠던 시절, 물감을 사주며 제자들을 독려하는 따뜻한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우제길 화백 역시 물감을 뿌리며 자유자재로 작업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당시 미술실에 걸려 있던 양 화백의 50호 그림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황영성 화백은 “이번 기획전이 현재 광주 미술의 뿌리를 만날 수 있는 전시”라고 했다.
타계하기 1년 전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아내가 집을 잡혀 마련해준 돈으로 연 전시에 대해 ‘혼과 한이 깃든 작품’ 등 평단의 반응은 남달랐지만 누가봐도 ‘팔릴 그림’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좌절한 그는 결국 이듬해 간경화가 악화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양 화백은 술을 무던히도 좋아했다.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금남로 ‘오센집’에서 광대춤을 추며 ‘빨간 마후라’를 즐겨불렀다. 애잔함과 페이소스가 점철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낭만의 시대는 끝났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처음으로 전남미술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 놓인 영정 사진은 술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고, 이 이야기는 신문 만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임종을 지켰던 오지호 화백은 “이제 술잔을 놓아라”고 말하며 울었다.
52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작품은 많지 않다. 유화 30여점과 드로잉, 수채화 등 170여점이 남아있고 거의 유족이 보관중이다. 양 관장은 “아버지 작품 세계와 삶을 조명할 수 있는 작은 미술관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작품이 흩어지지 않도록 힘들지만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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