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너머 실험실’전…‘예술공간 집’ 31일까지 전시
“실·커피 등 소재 실험 통한 ‘바람의 기억’ 연작, 판화 작업 선보여”
작품 앞에 서면 녹색 숲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듯 싶고, 새 소리도 들릴 듯하다. 어떤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 그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난 2018년 개관 후 의미있는 기획전을 열어온 ‘예술공간 집’이 올해 ‘전시실 너머 실험실’전을 시작한다. 45세 이상 작가에게 주목한 기획으로 1년에 한 명의 작가를 초청할 예정이다. 그 첫 주자는 종이 작업을 하는 표인부(51) 작가로 오는 31일까지(25일 휴관) 관람객을 만난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은 당초 지난 9월 광주비엔날레를 맞아 표 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광주 출신이지만 중앙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익산에 작업실을 둔 표 작가도 작품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라는 점에서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복병으로 비엔날레가 연기되며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중견 작가들의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내는 기획전으로 이야기가 확장됐다.
미술계에서 가장 애매한 위치에 있는 그룹은 45세부터 60대 초반 작가들이다. 20~30대 작가들은 수많은 지원 프로그램이 있고, 45세까지를 젊은 작가로 규정하는 사업들도 많지만 중견작가 대상은 거의 없다. 기획전 성격은 ‘전시실 너머 실험실’이라는 이름에 잘 나타나 있다. 중견 작가의 탄탄한 기존 작업을 바탕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조금 덜 영글었어도 새로운 시도들을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는 생각이다.
‘실험적’이라는 말에선 20~30대 작가를 연상하기 쉽다. 사실, 중견 작 들에게선 ‘늘 그 그림이 그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 앞에서 쉼 없이 고민하는 모습들 역시 30년 넘는 화업을 이어온 중견작가들의 일상이다.
첫 호명을 받은 표 작가는 “아주 즐겁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즐거운 모험심도 생겼다”고 했다. 조선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중국 남경예술학원 수인판화 석사 과정을 마쳤고 2012년부터 종이를 겹겹이 이어 붙인 ‘바람의 기억’ 연작으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칫 종이 붙이는 작업에 매몰돼 비슷한 작품의 수량만 추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3년전부터 나름 곁가지 작업들을 해 오고 있던 참이었는데 제안을 받았죠. 같은 맥락의 작품이지만 새로운 형태로 끄집어 내 제작하니 사고의 유연성도 생기고 재미있었습니다. 커피나 실을 활용하는 등 재료 사용에 대한 과감성도 생기구요.”
이번 전시작 중 파지(破紙)를 활용한 작품도 늘 머릿 속에만 있던 것을 구현한 작품이다. 기존 작품이 한지를 붙이는 작업이었다면, 이번엔 직접 글씨를 쓴 종이를 붙이는 작업을 시도하고, 10호 규모의 샘플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지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고백, 작가 노트, 그날 느낀 바람 등을 서예붓으로 써내려갔고 일일이 잘라 붙였다. 또 15년만에 판화 작품을 다시 시작했고 전시에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지난한 노동의 결과다. 초기에는 염색된 한지를 썼지만 인위적 느낌이 싫어 일일이 직접 채색을 한다. 이어 종이를 손으로 찢고, 잘라내 초배지를 바른 캔버스에 빼곡이 붙여나간다. 작업을 하고 나면 꼭 한의원에서 갈 정도로 중노동이 일상이 됐다. 이번엔 ‘바람이 훑고 지나간 초원의 의미를 담고 싶어’ 종이 띠를 일일이 붙여 나가기도 하고, ‘비움’을 모색하며 실에 먹을 뿌려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제 작품은 결국 바람을 통해 기억을 풀어내는 작업이죠.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맥락은 같지요. 작업 소재가 바뀌면서 같은 맥락 속에서 새로운 ‘바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수십년 전 읽은 책 ‘작업실의 자코메티’를 늘 마음 속에 품었다. 자코메티가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과정과 태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사물 등을 대하는 태도, 본인만이 갖고 있는 완성과 미완성의 의미, 유연성과 실험정신 등이 늘 마음에 남았다.
“지나 생각해 보면 40대 때 참 열심이었던 거 같아요. 40대 초반엔 힘들면 포기해 버리기도 했는데 중반 넘어서는 그런 부분들을 타협 대신 개선하려했고, 결과에서는 분명히 그 성과가 드러나더군요. 다음 전시장에서는 더 큰 실험을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문 관장은 “늘 다른 전시장과 똑같은 작품을 보여주는 건 작가에게도, 저에게도 의미가 없어 특별한 것은 아니더라도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표 작가님 작업실의 더 거친 작업들이 이번 전시에 나왔어도 좋았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감이 있었어요. 의미있는, 긍정적인 부담들이었죠. 기획의도에 맞게, 제가 스타트를 잘 끊어야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저를 포함해 중견작가들은 원숙함과 자기의 작품을 밀고가는 힘이 있지만 자칫 굳어지고 관념화될 수도 있죠. 이번에 그것들을 적게나마 깰 수 있어 의미 있었습니다”
그는 회화 작업도 다시 시작하고 마른 나무를 쪼개서 활용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는 등 좀 더 다양한 모험을 떠나보려 한다고 했다.
‘전시실 너머 실험실’ 시리즈가 중견작가들의 도전 정신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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