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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류빈기자

[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3> 유열의 음악앨범

by 광주일보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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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마음의 기척들이 만드는 기적

영화 감상에 앞서 시집 한 권을 읽는 버릇이 있다. 영화만 보는 것보다 배 이상 시간이 들기에 이것도 취미라면 악취미, 그래도 더 큰 여운을 얻게 되는 것 같아서 고수하는 방식이다.

영화에 스미기 좋을 듯한 시편 몇 줄을 읽어본다. 그뒤 소파에 앉아 재생 버튼을 누르면 활자와 이미지가 한 묶음처럼 쏟아져 온다. 이런 결의 감각은 직접 해봐야만 안다.

막 보려던 작품과 딱 들어맞아 보이는 시집을 집었다. 정다운 시인의 ‘나는 그때 다 기다렸다’. 한 줄 제목이 유독 선연해서 책을 들고 그저 오래 서 있었다. 한 사람을 ‘다’ 기다렸노라 선언할 정도의 아픔이란 어느 정도의 통각일까.

여기 기다림의 감정을 잘 녹여낸 영화가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2019년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극장가 멀티플렉스를 강타하는 메가톤급 흥행작이나 극장가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화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혹은 취향이라는 미명 아래 소개하고 싶었다. 그런 자야말로 시네필(Cinephile)이 아닌가?

“그때 나는 기다렸는데”

기다림과 엇갈림이라는 테마는 영화의 서사를 관통하는 일종의 ‘코드’다.

시작은 아름답다. 엄마의 유산과 같은 빵집 ‘미수 제과’에서 언니 은자와 함께 일하던 미수(김고은 분)는 교복을 입고 알바를 하고 싶다며 찾아온 현우(정해인 분)를 처음 만나 설레는 감정을 느낀다.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주변 모든 것이 그저 느껍고 따사로울 뿐이다. DJ의 목소리, 교복을 입고 찾아온 현우 그리고 빵 굽는 냄새까지... 특히 이날은 1994년 가수 유열이 라디오 ‘유열의 음악앨범’을 처음 진행하던 날이어서 미수의 기억에 유독 눈부시게 각인된다.

‘서울의 봄’, ‘D.P’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정해인, ‘도깨비’, ‘은교’ 등에서 맹활약한 김고은의 색다른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어서 이색적이었다.

현우는 어린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겪고 소년원에 다녀온 전력이 있다.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나쁜 친구들과도 어울렸지만,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성실하게 살아가려 고군분투하는 청년이다. 영화는 이 같은 아픔을 간직한 주인공들의 만남과 ‘첫’의 설렘을 DJ의 따뜻한 음성과 오버랩했다.

주인공들의 첫 만남을 기리는 영화적 모뉴먼트(기념물)는 다양한 작품에서 이채롭게 활용돼 왔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처음 조우했던 기차 씬의 상징성으로, ‘사랑은 낙엽을 타고’ 속 안사와 홀라파가 각자 일행에 섞여 스쳐가던 순간 등으로... ‘첫 만남’은 그 자체로 앞으로의 플롯에 영향을 주고 전개 방향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는 그 포인트가 ‘라디오’인 것.

 

교복을 입은 현우가 미수제과로 찾아온다. 이것이 현우와 미수의 첫 만남.

한편 시간이 흘러 1997년이 되면서 빵집 형편이 어려워졌고 미수 제과는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길을 걸었는데 오해가 쌓이면서 멀어진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던 어느 날, 취업준비를 하던 미수 앞에 이삿짐센터에서 알바를 하던 현우가 ‘보고싶었다’는 말과 함께 찾아온다. 그러나 현우는 만나자 마자 “군대에 가야 한다”는 비보를 전해 아쉬움을 남겼고, 미친듯 서로에게 끌려든 두 사람은 미수의 집에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다.

풋내기 첫사랑의 서툰 모습을 풀냄새 나게도 ‘잘’ 그린 영화다. 정해인과 김고은이 여태 쌓아온 필모그래피, 배역에 어울리는 마스크, 각자 역할에 몰입하는 적절한 페르소나를 보여줬기에 더 잘 몰입이 됐다. 갑작스럽게 현우를 집에 들이는 씬에서 미수가 옷가지를 구석에 던지며 “잠깐만 여기 있으라”는 장면도 소박한 사랑의 일면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흘러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미수. 여전히 유열의 음악앨범의 DJ는 유열이고, 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영화는 ‘기적’을 운운한다. 그런 모습은 불가능을 희원하는 첫사랑의 낯빛을 닮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열의 목소리와 추천곡들은 주인공들에게 “기적이 찾아올까요”라고 반문했다. 이 목소리는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는 전파였지만, ‘라디오’라는 점에서 어딘가 아날로그적 다정함이 느껴졌다.

“사실 난 지금 아주 많이 후진 상태야. 좋은 일 생기면 다시 연락하자”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연락한 현우에게 오해와 좌절 등이 쌓인 미수는 이렇게 답했다. 삶의 과도기에 놓여 성장통을 겪고 있던 자신을 ‘후진 상태’라고 지칭하며 스스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버린 것.

저마다에겐 참 ‘후진’ 시절이 있다. 이십 대 초~중반의 남자라면 특히, 군대를 막 전역한 뒤 까까머리를 쓰다듬던 그때, 젊은 나이에 가진 거라곤 ‘병장 만기 전역증’ 하나였지만 사회에서 큰 쓸모 없어 놀라웠던 그때. 그때의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부분이 곧장 사회에 내던져져 가장 찬란한 젊음을 불사르기에.

군입대를 앞두고 미수의 집에서 애틋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어느덧 영화 속 시점은 2005년 현재, 미수는 암울했던 시간을 벗어나 출판사에서 커리어 우먼으로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간다. 허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던 현우는 미수를 찾았다.

어디선가 라디오 멘트가 흘러나오고 유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카메라 보조로 일하던 현우에게 ‘불러줬으면 하는 이름’을 물었고, 현우는 오랫동안 삼켜 왔던 미수의 이름을 답으로 내놓았다. 미수가 곧장 현우에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피날레.

결말을 달리 써보고 싶다는 생각쯤은 남았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을 줄여주거나, 이들이 잠깐 만날 때 나눈 사랑의 시간들을 늘려줘도 좋았겠다. 마지막에 더 큰 찬란한 사랑의 순간을 쥐어줬어도 좋았겠다. 그래도 작품은 신파로 치닫지 않았을 것 같다. 때론 상상력과 여운의 진폭에 의존하는 열린 결말이 아쉬울 때도 있는 법이다.

세간의 지적과 같이 개연성 부족 등은 옥의 티로 남았다. 그럼에도 인과나 기승전결 따위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기적’은 ‘유열의 음악앨범’만의 섬세한 기척을 남겨 감상의 묘가 됐다.

애초에 제목에서 선언한 것 같지만, 작품의 반은 ‘음악’이 다 했다. 유열을 비롯해 이소라, 신승훈, 토이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90년대 특유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랑의 탄생과 실패, 한 끗 차이로 갈리는 우연과 운명을 아련한 음악과 함께 감상하고 싶다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퍽 괜찮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영화는 티빙,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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