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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땅과 연결되어 있다

by 광주일보 202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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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 시인의 광주 속살 순례기 ‘언저리와 변두리’ 시즌 2
<9> 각화동 농산물 시장
화통 삶는 소리 새벽 시장통부터
다음날 해장국집 문 닫을 때까지
동문대로 지킨 30년 세월
땀으로 거둔 농산물들이 모이고
식물시장·꽃시장도 열리고
음식으로, 반려식물로 함께 살아가

사람의 살이 되고 피가 될 온갖 농산물들이 모이는 각화동 농산물 시장은 화통 삶는 소리를 내지르는 새벽 시장통부터 다음날 해장국집 문 닫을 때까지 열린다. <임의진 제공>

강진에 살 때, 그땐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배추를 절이고 교인들이랑 목사관에서 김장도 하고 그랬다. 한번은 해남 살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태정 시인이 미황사 언저리를 드나들었는데, 인연 되어 가끔 친구들과 내 집을 오갔다. 어머니가 차려준 김장 반찬으로 저녁을 같이 먹던 날, 마침 그녀는 첫시집을 여름에 펴내고서 늦게서야 한 권 들고 인사차 온 길. 시집에 담긴 시 ‘배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배추 절이기)

이후 시인은 병마를 이기지 못해 환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았고, 나는 다시금 배추를 절이는 시기를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리고 찬바람도 나서 썰렁해. ‘성깔을 잠재우려는’ 추위다. 찬바람이 집과 방안까지 부는 것은 그를 가로막던 들의 벼들이 베어졌기 때문. 벼라는 바람벽이 무너졌기 때문. 황금들판은 이제 빈들이 되어 내년 봄날 농부가 찾아올 때까지 오랜 휴지기로 바람만 휘도는 땅. 들녘을 정성껏 지키던 농부가 겨우살이를 잘 끝내고 건강한 몸으로 귀환할 때까지, 이 찬바람 운동장엔 반쯤 옷이 찢긴 허수아비 혼자야. 눈보라 속에서도 부디 기도를 잘 바치렴.

“기차보다 더 멀리 걷던 사내. 기차보다 더 빨리 걷던 사내. 베잠방이에 머릿수건 두르고 청청한 하늘 찡찡한 햇살 잡아두고 한 발짝 한 발짝 5cm 간격으로 파란 모 심던 사내” 농부가 지켜온 전라도 땅. 송경동 시인의 제목이 엄청 긴 시 ‘내가 새마을호를 타고 순천에서 서울까지 숨가쁘게 달리는 동안’이라는 이 시 속에 사는 ‘파란 모 심던 사내’의 시간을 헤아려 본다.

 

논과 밭에 푸른 푸성귀를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 낫을 들고 논밭을 지키는 농부의 목판화는 이윤엽 작가의 선물인데, 벽에 걸어두니 파란 모 심던 사내를 날마다 만나는 꼴이다. 그가 웃는 날은 알량하디 알량한 나락 값이나 푸성귀 한 박스 팔아 돈 냄새라도 째깐(조금) 맡을 때 뿐이기에, 그는 평소 웃는 법이 없다.

농경 사회란 농사를 짓는 마을을 일컫고, 광주도 예외 없이 농사를 짓는 농토에 마을을 일군 것. 백제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농사를 짓던 유적이 발견되기도 해. 한번은 고갯길을 넘다가 도적떼를 만난 맹구는 오금이 저려 와들와들. “이 놈은 돈도 없고 생긴 걸로 보아 바보 멍청이 같고 그러니 문제를 맞추면 살려주고 모르면 죽이는 걸로 하자!” 심심하던 도적떼들이 환호성. 도적 두목 왈, “이 멍청이에겐 가장 쉬운 문제를 내겠다. 지금은 삼국 시대다. 그럼 그 삼국은 어디 어디냐?” 칼이 아랫배로 쓰윽 들어오려고 하자 맹구 왈 “배 째~실라~고 그려~” 이리하여, 백제 사람 맹구는 영문도 모르고 ‘답을 맞춰’ 살아났다는 이야기.

백제는 계백 장군의 전사 후로 그만 망하고, 전라도는 명검을 휘두를만한 장수들이 대부분 죽고 없어. 쇠스랑과 삽과 낫을 들고 농사를 짓는 이들만 허용되는 듯한, 침략당한 역사였다. 역사는 흐르고 대한민국 하고도 올해의 추수철 가을. 전라도땅 농산물이 집합하는 장소 광주 각화동 농산물 도매시장. 동학 농민군의 일원으로 죽창을 깎았을 분들이 곶감에 쓸 감을 깎고, 한쪽에선 이순신의 거북선을 지었을 법한 장인들이 고구마 박스를 접고 있다.

 

각화동 농산물 도매시장은 30년 세월 동안 동문대로를 지키며, 화통 삶는 소리를 내지르는 새벽 시장통부터 다음날 해장국집 문 닫을 때까지 열린다. 찰진 남녘의 흙이 품은 채소며 고구마, 주먹만한 감자가 농부의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이곳 집하장에 부려지면, 도매시장을 찾은 부식점 상인들이 몰린다. 뚝딱 시민들의 반찬이 되고 요깃거리가 될 농산물들, 사람의 살이 되고 피가 될 농산물들. 더러는 학교로 팔려가 어린 아이들의 건강한 급식 식단을 책임지게 될 싱싱한 농산물들.

나는 토마토를 좋아한다. 아니 더 격하게 사랑한다. 토마토가 과일인가 채소인가. 이 문제로 1893년 미국에선 법원에까지 갔다. 서인도제도에서 토마토를 수입해 팔던 존 닉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과일은 면세인데 반해 채소는 관세를 10프로나 떼는데, 뉴욕항에서 토마토를 채소로 관세를 매긴 것에 불만을 품고 소송한 사건이다. 판사 왈 “밥상에선 채소가 되기도 하지만 식물로는 씨앗이 있어 과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토마토는 채소로들 다 아는 마당이니 그냥 채소에 가깝다고 판결합니다.” 존 닉스는 계속 관세를 내야 했다.

토마토는 원산지가 남미다. AD 700년경 아즈텍 문명 사람들이 따먹던 토마토를 콜럼버스 탐험가 일행이 유럽 전역에 퍼트렸다. 특히 이탈리아에선 피자와 파스타를 만들 때 토마토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소스였다. 훗날엔 품종을 개량하여 쉽게 따먹을 수 있는 ‘방울 토마토’도 만들었다. 스페인의 도시 부뇰에선 토마토 축제 ‘토마티나’를 해마다 연다. 일주일동안 진행되는 토마토 축제의 절정은 ‘토마토 던지기’다. 처음 이 도시에선 ‘거인의 큰 머리’라는 종이인형 행렬 축제가 있었는데, 1945년경 축제 도중에 어린 친구들이 토마토를 던지면서 싸움이 번졌고, 재밌는 풍경에 시민들도 가세하여 말랑말랑한 토마토를 마치 눈싸움하듯 던지면서 축제로 승화되었다. 싸움판이 축제판이 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을 당장 멈추고, 총과 미사일을 땅에 내려놓고, 차라리 토마토 축제를 벌인다면 좋겠어.

 

농부들이 땀으로 거둬들인 농산물은 우리 밥상을 책임진다.

“땀에서 거둔 것이 똥값으로 둔갑하고 머리에서 나온 것이 금값으로 출몰하는 세상이 당신네 삼대를 누빈다 해도 농민은 거짓을 추수할 수 없습니다. 농민은 전쟁을 추수할 수 없습니다. 농민은 횡재를 추수할 수 없습니다.” 시인 고정희의 기도를 머리맡에 써두고 맞이한 새벽. “언젠가 새벽은 오겠지요?” 누이의 외마디 말에 대답하지 못했던 시절이 아파라. 고작 나는 내 작은 산속의 텃밭에서 ‘리틀 포레스트’. 거창한 유기농이다 무공해다, 산업으로의 농업도 아닌 이른바 ‘냅둬 농법’의 순진하고 순수한 초야의 호미질. 가끔 토마토를 심어 여름날 따먹기도 했다.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각화동까지 내다 팔 무엇은 아니고, 땅을 놀리면 동네 할매들에게 책을 잡히니 깨작깨작 면피하는 수준이다.

각화동에는 또 식물시장, 꽃시장이 있다. 그곳에서 국화 한 소쿠리를 사와 꽃밭에 심었던 게 오래전 일. 꽃도 농산물에 분류되어 팔리고, 어떤 경우는 ‘반려식물’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 농산물 시장과 마찬가지로 이 식물시장도 인생의 소중한 연결고리다. 북미원주민 미크맥족은 이를 ‘노고모크’라고 하는데,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형제자매다’라는 뜻. 미크맥 부족의 창조 설화에 의하면 생명은 땅과 물과 바다에 이는 물거품, 그리고 땅에 떨어져 구르는 나뭇잎에서 기원했다고 전한다, 또 알콘킨 부족은 가을에 떨어진 단풍나무의 잎사귀, 일곱 갈래 뾰쪽한 갈래로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 국기에 담긴 단풍나무 잎사귀는 이 창조 설화의 내용 또한 품고 있다.

우수수 낙엽이 지는 가을은 황량해 보이지만, 땅으로 착지한 이파리들을 덮어 미래를 품으며, 새로운 날을 잉태하는 창조의 시기인지도 모른다. 가로수로 졸조르르 심긴 은행나무 잎이 져가고 있는 각화동. 화원들에 놓인 국화 화분에 낙엽이 쌓이자 털어주고 있는 주인장들, 그 뽀짝 옆으로 트럭에 가득 실린 고구마를 하역하는 장면까지 ‘식물의 세상’에 펼쳐지는 다큐는 오늘도 재방송 중이다.

각화동 귀퉁이 돌아 문흥동성당 곁에 ‘만인 세탁소’라고 있다. 내가 거의 20년 동안 단골 삼아 옷들을 맡기는 곳. 참고로 이곳 수북면엔 세탁소가 없어. 지난여름 입은 옷들을 세탁 맡기고, 오는 길에 농산물 시장에 들러 땅콩을 뭉탱이로 샀다. 엊그제 농사짓는 매형이 땅콩을 한 주먹, 그게 자꾸 생각이 나 아예 한 박스를 시장에서 구입했다. 볶아 먹는 것보다 삶아서 먹는 게 간단하고 맛나길래 지금 푹 삶는 중이렷다. 나는 시방 각화동과 연결되어 있고, 어느 농부의 땅콩밭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는, 어머니이신 땅, 남녘의 붉디붉은 흙과 연결되어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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