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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에세이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을 뜻한다. 여기서 일정한 형식은 아마도 시나 소설, 희곡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이르는 말일 터다. 즉 에세이는 장르라는 외피를 던지고, 작가의 느낌이나 체험을 쓰는 글이다. 하나 느낌이나 체험을 쓰는 글이라는 말로 에세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거의 모든 글은 각자의 느낌이나 체험이 재료가 되니까. 일기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글도, 노트 구석의 낙서마저도 그렇다. 그것들 모두를 에세이라 부르게 주저함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에세이에는 위의 글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 특별함은 솔직함과 유려함의 균형에서 비롯될 것이다. 일기나 낙서는 구태여 타인에게 보여줄 일이 없으니 솔직하기 이를 데 없을 일이지만, 같은 이유로 단정하고 보기 좋게 쓸 필요도 없다. 각종 SNS에 올리는 글은 남들 눈을 의식해 쓰일 테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마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이에서 에세이 쓰기는 존재한다. 요컨대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되,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글이라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갖는 셈이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그것이 자신의 과거사일 때는 더욱 그렇다. 책 속에 화자는 윤리적이거나 소탈하거나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 글쓴이의 삶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솔직하되 유려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에세이 작가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최근에 활발히 저작 활동은 하는 여성 작가들은 더욱 그렇다. 페미니즘에 입각한 자기 체험을 쓰고, 소수자로서 발언을 이어나가고, 그것을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실로 거대한 용기를 수반하고, 그 용기는 타인이 미루어 짐작하기 힘든 깊은 동굴이나 지하 갱도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자기 고백의 성격을 갖기에 그렇다. 어떻게 진정한 자기 고백을 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유려한 자기 고백을 할 것인가? 그것이 글쓴이 자신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에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지도 모를 일인데.
임지은 산문집 ‘헤아림의 조각들’은 그 위험성을 모두 헤아리고, 그걸 알면서도 박차고 나온 책이다. 저자의 자기 고백은 무한히 솔직하되 그만큼 담백하고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폭력적이지 않다. 작가는 일견 쉽게 받아들여지는 논리들에 반하는 강짜를 부리지만 타인의 사정 앞에서는 그 또한 그럴 수 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달리 말해 끝없이 헤아린다. 예를 들어 의견이 첨예하게 다른 사람을 두고 우리는 동일하기보다는 동등한 사이라고 중얼거리는 식이다. 데이트 폭력의 상처 안에서도 오직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었던 감정을 마주할 줄 안다. 오로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여야만 할 것 같은 할머니와의 일화에서도 가감 없는 솔직함은 복잡한 방식으로 읽는 이의 슬픔을 건든다. 그것은 나도 저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했었지만.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하는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느낌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내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한 권의 책이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의중은 모두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나 체험을 글로 쓴다고 모두 책이 되는 건 아니다. 그 느낌이나 체험이 남이 왜 읽어야 하는가? 임지은은 위에 말한 가감 없음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쓸 줄 안다. 그리하여 작가의 솔직함은 독자에게 읽을 만한 것이 된다.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지 못해 애가 타는 노인들과 그 곁에 떨어지는 목련이 한 페이지 안에서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타인의 경험으로 진입할 수 있다. 문장의 힘으로 그 장면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에세이는 읽는 이의 손을 잡는다. 잡아당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쪽으로 오라고 한다. 우리는 속절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가서 함께 헤아릴 것이다. 너와 나를, 우리를, 우리를 둘러싼 세계까지도. <시인>
그 특별함은 솔직함과 유려함의 균형에서 비롯될 것이다. 일기나 낙서는 구태여 타인에게 보여줄 일이 없으니 솔직하기 이를 데 없을 일이지만, 같은 이유로 단정하고 보기 좋게 쓸 필요도 없다. 각종 SNS에 올리는 글은 남들 눈을 의식해 쓰일 테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마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이에서 에세이 쓰기는 존재한다. 요컨대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되,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글이라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갖는 셈이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그것이 자신의 과거사일 때는 더욱 그렇다. 책 속에 화자는 윤리적이거나 소탈하거나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 글쓴이의 삶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솔직하되 유려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에세이 작가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최근에 활발히 저작 활동은 하는 여성 작가들은 더욱 그렇다. 페미니즘에 입각한 자기 체험을 쓰고, 소수자로서 발언을 이어나가고, 그것을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실로 거대한 용기를 수반하고, 그 용기는 타인이 미루어 짐작하기 힘든 깊은 동굴이나 지하 갱도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자기 고백의 성격을 갖기에 그렇다. 어떻게 진정한 자기 고백을 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유려한 자기 고백을 할 것인가? 그것이 글쓴이 자신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에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지도 모를 일인데.
임지은 산문집 ‘헤아림의 조각들’은 그 위험성을 모두 헤아리고, 그걸 알면서도 박차고 나온 책이다. 저자의 자기 고백은 무한히 솔직하되 그만큼 담백하고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폭력적이지 않다. 작가는 일견 쉽게 받아들여지는 논리들에 반하는 강짜를 부리지만 타인의 사정 앞에서는 그 또한 그럴 수 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달리 말해 끝없이 헤아린다. 예를 들어 의견이 첨예하게 다른 사람을 두고 우리는 동일하기보다는 동등한 사이라고 중얼거리는 식이다. 데이트 폭력의 상처 안에서도 오직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었던 감정을 마주할 줄 안다. 오로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여야만 할 것 같은 할머니와의 일화에서도 가감 없는 솔직함은 복잡한 방식으로 읽는 이의 슬픔을 건든다. 그것은 나도 저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했었지만.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하는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느낌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내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한 권의 책이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의중은 모두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나 체험을 글로 쓴다고 모두 책이 되는 건 아니다. 그 느낌이나 체험이 남이 왜 읽어야 하는가? 임지은은 위에 말한 가감 없음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쓸 줄 안다. 그리하여 작가의 솔직함은 독자에게 읽을 만한 것이 된다.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지 못해 애가 타는 노인들과 그 곁에 떨어지는 목련이 한 페이지 안에서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타인의 경험으로 진입할 수 있다. 문장의 힘으로 그 장면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에세이는 읽는 이의 손을 잡는다. 잡아당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쪽으로 오라고 한다. 우리는 속절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가서 함께 헤아릴 것이다. 너와 나를, 우리를, 우리를 둘러싼 세계까지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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