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호남서 한 분 뿐인 대표·33인 중 유일하게 감옥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화순군 앵남리 묘소 봉분 훼손에 관리 엉망 … 참배객 “고개 못 들겠다”
화순군에 있는 호남 유일 ‘민족대표 33인’ 양한묵 선생 묘소가 파헤쳐지는 등 심각하게 훼손됐는데도 제대로 관리하긴커녕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봉분의 흙이 뭉텅이로 떨어져나간 것은 물론 비석부터 묘소로 올라가는 입산로 등 총체적으로 관리가 부실한 상황이다. 묘소를 관리해야 할 국가보훈처와 화순군은 매년 화순읍 남산공원에 별도로 만든 추모비에서만 제향을 올리느라 정작 양 선생의 유해가 묻힌 묘소를 방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일보 취재진이 지난 28일 찾아간 화순군 앵남리 양 선생 묘소는 도저히 참배객을 맞을 상황이 아니었다.
봉분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양 측면의 흙이 떨어져나가 잔디 뿌리가 보일 지경이었으며, 봉분 인근 잡초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풀이 어지럽게 자라나 있었다.
‘지강 거사 양공 한묵지묘’라고 적힌 70㎝ 크기의 비석은 하얀 오물이 얼룩덜룩 묻어 있어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든 상태였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산로는 더욱 처참한 상황이었다. 나무 계단 대부분이 썩어버렸으며, 일부는 아예 부러지거나 유실됐다. 또 10㎝ 크기의 녹슨 대못이 곳곳에 튀어나와 참배객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묘소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묘소는 마을 골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나오는 ‘동네 뒷산’에 있는데, 마을 어귀에는 안내판이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산 입구에 가서야 ‘양한묵선생 묘소’라고 적힌 30㎝ 크기의 조그만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묘소 인근에는 3기의 봉분이 뒤섞여 있어 봉분 옆 안내판이 없으면 이 곳이 양 선생의 묘소라는 사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더욱이 안내판에도 양 선생의 공적이 4줄짜리 글로 짧게 적어둔 것이 전부라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황이 이런데도 화순군은 홈페이지를 통해 양 선생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화순군 문화재 포털 사이트 ‘디지털화순문화대전’에서는 “양한묵 무덤은 관리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매년 문중과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실제 제향은 지난 1965년 화순읍 광덕리 남산공원에 세워진 ‘양한묵 선생 추모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배객 사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28일 묘소를 참배한 김석원 전남학숙 관장은 “학생들을 데리고 묘소를 참배하러 갔다가 처참한 관리 상태를 보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며 “대한민국이 있게 해 준 분인데, 정부나 지자체에서 그 의미를 살려주진 못할 망정 봉분이 무너져 내리도록 방치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양 선생은 해남군 출신으로 1904년 동학에 입교해 화순군 도곡에서 천도교 도사로 활동했다. ‘대종정의’ 등 20권의 천도교 교리서를 저술했으며 교리 강습소를 개설해 계몽 운동에 힘썼다.
양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이후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양 선생은 같은 해 5월 26일 순국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사한 인물로 남았다.
양 선생의 유해는 서울 수철리(현 성동구 금호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22년 천도교 교인들 주도로 현재 위치인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야산으로 이장됐다.
/화순=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봉분의 흙이 뭉텅이로 떨어져나간 것은 물론 비석부터 묘소로 올라가는 입산로 등 총체적으로 관리가 부실한 상황이다. 묘소를 관리해야 할 국가보훈처와 화순군은 매년 화순읍 남산공원에 별도로 만든 추모비에서만 제향을 올리느라 정작 양 선생의 유해가 묻힌 묘소를 방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일보 취재진이 지난 28일 찾아간 화순군 앵남리 양 선생 묘소는 도저히 참배객을 맞을 상황이 아니었다.
봉분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양 측면의 흙이 떨어져나가 잔디 뿌리가 보일 지경이었으며, 봉분 인근 잡초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풀이 어지럽게 자라나 있었다.
‘지강 거사 양공 한묵지묘’라고 적힌 70㎝ 크기의 비석은 하얀 오물이 얼룩덜룩 묻어 있어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든 상태였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산로는 더욱 처참한 상황이었다. 나무 계단 대부분이 썩어버렸으며, 일부는 아예 부러지거나 유실됐다. 또 10㎝ 크기의 녹슨 대못이 곳곳에 튀어나와 참배객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묘소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묘소는 마을 골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나오는 ‘동네 뒷산’에 있는데, 마을 어귀에는 안내판이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산 입구에 가서야 ‘양한묵선생 묘소’라고 적힌 30㎝ 크기의 조그만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묘소 인근에는 3기의 봉분이 뒤섞여 있어 봉분 옆 안내판이 없으면 이 곳이 양 선생의 묘소라는 사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더욱이 안내판에도 양 선생의 공적이 4줄짜리 글로 짧게 적어둔 것이 전부라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황이 이런데도 화순군은 홈페이지를 통해 양 선생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화순군 문화재 포털 사이트 ‘디지털화순문화대전’에서는 “양한묵 무덤은 관리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매년 문중과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실제 제향은 지난 1965년 화순읍 광덕리 남산공원에 세워진 ‘양한묵 선생 추모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배객 사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28일 묘소를 참배한 김석원 전남학숙 관장은 “학생들을 데리고 묘소를 참배하러 갔다가 처참한 관리 상태를 보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며 “대한민국이 있게 해 준 분인데, 정부나 지자체에서 그 의미를 살려주진 못할 망정 봉분이 무너져 내리도록 방치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양 선생은 해남군 출신으로 1904년 동학에 입교해 화순군 도곡에서 천도교 도사로 활동했다. ‘대종정의’ 등 20권의 천도교 교리서를 저술했으며 교리 강습소를 개설해 계몽 운동에 힘썼다.
양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이후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양 선생은 같은 해 5월 26일 순국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사한 인물로 남았다.
양 선생의 유해는 서울 수철리(현 성동구 금호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22년 천도교 교인들 주도로 현재 위치인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야산으로 이장됐다.
/화순=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728x90
반응형
'유연재기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쿨존 어린이 교통사고 5년간 169명 사상 (0) | 2023.03.03 |
---|---|
곳곳 부서지고 곰팡이 핀 위패 …씁쓸한 독립역사 현장 (0) | 2023.03.02 |
광주·전남 곳곳서 3·1절 기념식 (0) | 2023.02.28 |
광주 공무원들 연초 업무 과중 호소...시민들 “한시적 과중…책임감 없다” (0) | 2023.02.27 |
“지자체 믿고 분양 받았는데…” 사기분양 피해에 6년째 한숨 (0) | 202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