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여행을 갈 때면 나는 늘 식물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식물을 공부한 후로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 버렸다. 파리에서 요리 공부를 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을 때도 그랬다.
유럽은 식물 연구를 오래 해 온 데다 문화도 발달하여 아무리 도심일지라도 식물과 관련된 장소가 많다. 파리 주변의 식물원과 수목원, 공원, 개인 정원,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자연과학 서적을 판매하는 책방 등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더 이상 갈 만한 식물 장소가 없어지자 나는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술관을 헤매는 내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앙리 마티스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 어느 방 테이블 위에는 몇 송이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분명 아네모네였다.
아네모네는 수많은 예술가로부터 영감의 소재가 되어 왔다. 앙리 마티스, 라울 뒤피, 르누아르, 오딜롱 르동은 각자 곁에 존재한 아네모네를 그림으로 그렸다. 아네모네는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실내 화훼식물로서 인기가 많았고, 이 식물이 지닌 로맨틱한 이미지와 강렬한 색의 화피는 예술가들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식물화와 식물학 일러스트(식물 세밀화)의 차이는 그림 속 식물의 속(가족) 뿐만 아니라 종과 품종까지도 식별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16세기 독일의 약제상인 바실리우스 베슬러는 앞선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네모네를 그림으로 그렸다. 다만 그의 그림 속 아네모네는 뿌리부터 줄기, 잎과 꽃 식물의 전체 모습이 있고, 그림 속 세 종의 색과 형태 특징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 그림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네모네 식물 세밀화일 것이다.
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아네모네는 우리의 이용 목적에 의해 일 년 내내 꽃이 피도록 재배되지만 원래 이들은 이른 봄 숲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숲과 들의 아네모네는 인간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을 따라 오로지 제 삶을 살아간다.
아네모네의 또 다른 이름은 바람꽃이다. 우리나라 숲에는 이십여 종의 바람꽃이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서양의 화가가 그린 외래종과 꽃 시장에 유통되는 품종만 보아 왔기에 숲에서 바람꽃을 보더라도 이것이 아네모네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기 일쑤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바람꽃으로는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들바람꽃 등이 속한 바람꽃속과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이 속한 너도바람꽃속 그리고 만주바람꽃속과 나도바람꽃속, 매화바람꽃속이 포함된다.
이들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화피의 형태, 꽃밥의 색 등이 천차만별이다. 나는 특히 변산바람꽃을 좋아한다. 변산바람꽃은 꽃이 빨리 가장 빨리 피는 편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1993년 신종으로 발표되었다. 너도바람꽃과 비슷하나 화피가 넓고 꽃밥이 보라색이다. 꽃잎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꽃받침이며, 그 안에는 여러 조각의 퇴화한 꽃잎이 있다.
나는 7년 전 여수에서 변산바람꽃을 처음 만났다. 아직 추위가 다 가지 않은 서늘한 공기, 낙엽이 다 부서지지 않은 물기 가득한 땅에서 단 두 송이의 변산바람꽃이 피어 있었다. 독특한 색과 형태에 나는 금방 이들이 도감 속에서만 봤던 바로 그 식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붉은 줄기 끝에 난 흰 화피 그리고 그 안의 보라색 수술과 연두색 암술 조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자연만큼 훌륭한 컬러리스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자연의 색 감각을 따라갈 수 없다.
지금 이 추위가 지나면 변산바람꽃도 고개를 내밀 것이다. 우리가 식물의 꽃으로 인해 느끼는 감동은 외관상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꽃은 식물이 긴 시간을 지나 이루어낸 찰나의 현상 그 자체다. 변산바람꽃은 내게 겨울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만나는 봄에 대한 반가움을 전해 주었다.
매일 밤샘 작업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몇 개의 밤을 지나 피어날 봄꽃을 떠올리면 이 겨울이 마냥 황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식물 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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