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의 너울을 벗고 권력에 맞서 정론을 외치다
영조실록(1725년 5월 9일)에 눈길을 끄는 글이 하나 있다. 영부사 이이명의 처 김씨 부인이 상언(上言)을 올렸다는 내용이다. 김씨 부인은 서포 김만중의 딸이다. 부전여전이라고 할까. 아버지의 문재를 이어받아 딸의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올린 글은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씨 부인은 신임옥사로 남편, 아들, 사위, 며느리를 한꺼번에 잃었다. 사실상 멸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그의 상언으로 손자를 구하고 집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언이란 임금을 향해 올린 글을 말한다. 김씨 부인은 이이명의 죽음과 아들 이기지의 죽음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임금이 원통함을 풀어준 것에 감사를 전한다.
“스스로 복분 아래 눈을 감지 못하고 귀신 되기를 기약하였더니 이에 하늘의 도가 밝게 돌아보시고 임금님의 명이 이에 비치어 죽은 지아비 신(臣) 이이명의 끝없는 한과 원통함을 시원하게 씻고 복관하여 제사 지내기를 명하셨습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올린 상언을 비롯해 근대 계몽기 여성의 상소, 통문은 당대 여성들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유교 가부장제 사호의 강요된 부덕(婦德)을 감내해야 했던 고전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
권력과 시류에 맞서 목소리를 냈던 여성들을 조명한 책 ‘격정의 문장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여성들을 소환한다. 이들 가운데는 더러 이름난 가문의 출신도 있지만 생애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자는 이화인문과학원 김경미 교수로, 지금까지 고전소설을 사회학적, 젠더적 시각에서 연구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책에는 관습에 도전한 여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개인이 국왕이나 관에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제도로 원정(原情)이 있는데, 원정의 한 예로 평민이 올린 글이 눈길을 끈다. 조원서의 처가 딸을 구명하기 위해 관에 제출했던 원정이 그것이다.
딸이 남편에게 버림받고 양반가 첩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이에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회적 비난은 받을 수 있어도 관의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라는 논리다.
“설령 처를 버린 남편이 와서 정소를 한다 해도 남의 첩이 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천하다고 할 뿐입니다. 훗날의 경계를 위해서는 삼종지도를 잃었지만, 그렇다고 어찌 재혼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근대 계몽기에 이르면 여성들을 주 독자층 삼아 한글로 간행한 제국신문 등 신문이 발간됐다. 신문은 근대 여성의식이 형성되는 공론장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독자투고였다.
일반적으로 당시 여성 독자투고는 과부 개가와 첩, 여성교육에 집중돼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거나 기부하며 쓴 것이 많다. 다음으로 여성교육이었다. 또한 여성들은 신문의 효용을 비롯해 개인적 사연, 개가, 첩에 관한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황성신문(1906년 5월 15일)에 신낭자라고 밝힌 여성이 투고한 글은 여성 교육을 강조한 내용이다. ‘여자교육이 없어서는 안 된다(女子敎育이 不可無)’라는 제목부터 주장을 짐작케 한다.
“어떤 이는 “남자교육도 갖춰지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여자교육을 시작하겠는가”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남자만 교육해도 이미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여자교육에 관심을 두겠는가?”라고 하는데 이는 진화의 시대에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낸 원리에도 전혀 무지한 것이다!”
사실 여성들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드러나지 않았다. 저자는 드러나지 않았다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규정한다. “주변적으로 간주되어 온 존재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책을 펴낸 이유일 것이다.
<푸른역사·2만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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