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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서효인의 ‘소설처럼’]어떤 비관 - 안녕달 『눈, 물』

by 광주일보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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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실은 운명이다. 우리는 대체로 정해진 운명을 따르되, 그 따름의 과정을 애써 잊고 산다. 죽음이 특히 그렇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겠지만 죽음의 공포에 질려 일상을 해칠 수는 없다. 죽음보다는 삶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 거대한 상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도가 전부이고,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면, 되돌아올 삶에 죽음은 영향을 미친다. 상실의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제대로 잊기 위해서는 무결에 가까운 애도가 필요하다. 실컷 울어도 좋고, 마음껏 추억해도 좋다. 울음과 추억 속에 상실된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했던 시간이 드러날 것이기에.

안녕달 그림책 『눈, 물』은 예정된 상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이야기이자, 어른을 위한 환상동화다. 어느 날 한 여자는 ‘눈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그야말로 눈(雪)―아이이기 때문에 온기가 닿으면 녹아 없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자가 아이를 안자 아이는 여자 품에서 녹아내린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내려놓는다. 눈아이는 그래도 아이여서 여자를 쳐다본다. 손을 내민다. 여자는 자신의 온기가 무서워서 눈으로 담을 쌓는다. 담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아이는 누워 있다. 여자는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엄마가 섬그늘에…….”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든다.

여자와 눈아이의 행복한 일상은 계속될 수 있을까? 눈아이는 결국 눈-아이이기 때문에 봄이 오면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저 너머에서 초록이 다가오자 여자의 마음은 급해진다. 어느 날 전단에서 ‘언제나 겨울 무료 체험 이벤트’라는 문구를 발견하고는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도시로 떠난다. 눈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눈아이를 위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눈아이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어서, ‘언제나 겨울’을 구하기 위해. 화려한 도시는 여자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돈이 있는 자는 필요한 것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최선을 다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돈이 없는 자는 마음만 급하다. ‘째깍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는 눈아이의 상실을 경고한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하는 여자는 그렇게 도시의 이면으로, 도시의 일부로, 도시의 파편으로의 삶을 시작한다.

과연 여자는 주어진 시간 내에 ‘언제나 겨울’을 구해 눈아이와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여자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눈아이는 녹지 않고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까? 상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는 사채업자의 유혹에 잠시 끌리기도 하고, 우유 배달 같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실은 운명이고,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언제나 겨울’을 얻어 집에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물웅덩이뿐이었다. ‘눈’은 사라지고 ‘물’만 남은 것이다. 여자는 두 손으로 물을 모아 ‘언제나 겨울’ 속에 넣었다. 작은 물웅덩이는 얼어붙어 여자의 온기를 잠시 붙잡아 두기도 하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거의 다 풀어버렸지만, 『눈, 물』은 종이를 넘기며 그림을 직접 보아야만 하는 책이다. 그래야만 눈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여자의 간절함이 손가락 끝에서 심장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심장까지 전달된 슬픔은 곧 타인에 대한 이해가 된다. 그렇기에 『눈, 물』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자와 아이만 있던 공간과, 도시의 공간은 그림에서 검은색 쓰레기 벽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실제 책에서도 두 공간은 다른 질감의 종이를 공간에 따라 각기 써서 종이책이 줄 수 있는 경험의 최대치를 담백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가 잊고 있던 아픔을 깨운다. 뒤표지의 추천사의 말마따나 “어떤 통증은 무뎌진 상태의 우리를 깨우기 위해 필요하다.”(소설가 정세랑)

치명적인 상실을 겪은 당신과 그 상실의 터널을 애써 빠져나오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파스텔톤의 낙관은 없지만, 3월의 눈처럼 먼지가 쌓인 채 녹아내려가는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에는 이러한 색상의 비관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비관만이 이 미친 세상에서 우리를 미치지 않게 붙잡아 주는 동력이 될지도 과연 모를 일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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