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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완도 호랑가시나무와 어떤 과도기

by 광주일보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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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식물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지난달 책장을 정리하다 우리나라 1세대 식물학자인 장형두 선생의 책 ‘학생 조선 식물 도보’(1948년)를 발견했다. 장형두 선생은 해방 이후 펴낸 이 책 속 모든 글을 우리말로 썼다. 식물은 묻사리, 학명을 갈 이름으로. 그렇게 일본 말을 완전히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마지막에는 ‘우리나라 국명과 일본명 맞대보기’장이 있다. 선생은 이 장 꼭지에 이렇게 일러두었다. ‘일본명을 여기에 쓴 것은 아직까지 일본 말 참고서가 많이 쓰이고 있는데 비추어 똑바른 우리말 이름을 찾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과도기적 조치다.’

나는 ‘과도기적 조치’라는 말을 되뇌었다. 왜냐면 나 역시 내가 그리는 그림이 ‘식물 세밀화’라는 용어로 알맞지 않지만 선생의 말씀처럼 과도기적 조치로 현재 ‘식물 세밀화’와 ‘식물학 일러스트’를 함께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과도기를 살아가기에 해야 하는 일, 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명함에는 두 개의 직업명이 적혀 있다. 식물 세밀화가 그리고 식물학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의미인 두 용어를 굳이 나란히 써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의 원어는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 해석하면 식물학 그림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식물 세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보태니컬 일러스트 용어에 ‘세밀’이라 는 의미를 포함시킨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세밀’이란 극사실 그림, 기술적인 재현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기에 식물 해부도로서 식물종의 형태적 특성을 드러내는 내 그림에 식물 세밀화라는 용어는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영역의 과학 일러스트인 의학 일러스트처럼 식물학 그림, 식물학 일러스트라는 용어가 알맞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식물 세밀화라는 용어를 아예 쓰고 싶지 않지만, 2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미 쓰여 온 용어를 당장 쓰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이전의 역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지금 식물 세밀화와 식물학 일러스트를 함께 쓰고 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과도기적 조치이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식물 세밀화 대신 식물학 일러스트 혹은 식물학 그림이라는 용어를 쓰기 바란다.

며칠 전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여수에 갔다가 식당 골목에서 한창 뾰족한 잎을 매단 호랑가시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완도 호랑가시나무로 보이는 개체도 있었다. 완도 호랑가시나무는 천리포수목원의 설립자인 민병갈 원장이 1978년 완도에 식물 탐사를 갔다가 발견한 호랑가시나무와 감탕나무의 자연 교잡종이다. 완도 호랑가시나무는 호랑가시나무에 비해 잎이 둥글고 잎 가장자리 가시의 뾰족함도 완만하다.

민병갈 원장은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충남 천리포 바다 앞의 땅을 사서 정원을 꾸리고 아직 우리나라에 도입되지 않은 외국 식물을 정원에 심어 소개했다. 그는 우리나라 자생식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1970~1980년 당시 화훼식물을 연구했던 어르신 선생님들의 말씀으로는 지금이야 천리포수목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처음 그곳을 조성할 때만 해도 관상식물을 위한 정원을 꾸리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고 한다. 해방 이후 먹고살기도 힘든데 꽃은 무슨 꽃이냐는 소리를 매일 듣는 상황이었다며. 그런 시대를 지나 이제 천리포수목원은 전국의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 우리는 50여 년 전의 민병갈 원장처럼 곳곳에 크고 작은 정원을 만들고 있다. 민병갈 원장은 화훼식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우리나라 식물연구, 문화 과도기를 몸소 지나온 분이다.

그가 특별히 좋아했던 호랑가시나무 가족은 흔히 홀리라고 불리며 크리스마스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호랑가시나무는 우리에게 늘 붉은 열매를 가지에 가득 매단 이미지로 익숙하다. 그러나 내가 여수에서 본 이 식물들은 지금 노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이 열매는 이제 검붉은 노란색, 붉은빛이 섞인 주황색 그리고 어두운 붉은색처럼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빛깔을 지나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빨간색 열매가 될 것이다.

식물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식물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도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 그리고 벌개미취의 개화처럼 내 눈앞에 놓인 자연현상이란 각자가 수없이 지나온 과도기의 결과라는 것을, 식물을 관찰하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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