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다른 풍광 ‘초암정원’…편백나무·대나무숲 최고 산책로
고흥 ‘힐링파크 쑥섬쑥섬’부터 해남 ‘문가든’까지 자연의 재발견
우리나라 대표 민간정원 ‘소쇄원’ 별서정원·별서원림으로 평가
나의 정원이 모두의 정원으로…힐링 공간이 된 정원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1890~1938)는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한다”라고 했다. 요즘 ‘국가 정원’부터 ‘옥상 정원’ ‘베란다 정원’ ‘한 평 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원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개인이 수 십 년 동안 가꿔온 ‘민간정원’은 ‘코로나 엔데믹’ 시대에 도시인들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치유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효심으로 60여년 가꾼 ‘초암(草岩) 정원’
“어린 날에는 ‘낳아주신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웠고, 어른이 되어서는 ‘키워주신 어머니’가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60여 년간 저와 교감하고 대화를 하며 키운 나무들입니다. 나무 하나하나마다 애틋함과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청람(靑藍) 김재기(83) 전 광주은행 상임감사는 20대부터 현재까지 60여 년 동안 고향인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초암마을 고택 내에 나무를 심고 가꿔오고 있다. 애초부터 유원지나 관광지, 정원으로 꾸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동안 쉼 없이 나무를 심은 까닭은 오로지 ‘낳아주신 어머니’와 ‘키워주신 어머니’, 두 분 어머니를 위한 효심(孝心)때문이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가꾼 ‘초암 정원’은 지난 2017년 10월 전남도 민간정원 제3호로 등록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봄 매화·산수유꽃, 여름 편백나무·대나무숲, 가을 금목서·은목서, 겨울 산다화(애기동백)·소나무 등 사계절마다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 사이로 난 호젓한 산책로는 ‘초암정원’ 최고의 힐링 코스이다.
3년째 이어지는 전 세계적인 ‘코로나 19’ 유행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재발견’했다. ‘집콕’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유명 관광지 대신 나무숲과 꽃밭 등 자연에 이끌리는 이들이 늘었다.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와 꽃의 이름을 알고자 하고, 화분이나 베란다, 옥상, 텃밭에 꽃과 작물, 나무 등 ‘반려식물’을 심어 작은 화단이나 정원을 가꾸기도 했다. 자연이 발산하는 초록빛깔과 생명력은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과 활력을 주었다. 특히 ‘코로나 엔데믹’ 시대에 개인이 수 십 년 동안 공들여 가꾼 ‘민간 정원’이 부각되고 있다.
#전통정원 맥 잇는 ‘치유’ 민간정원 조성
전남지역에는 많은 정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소쇄원·명옥헌·백운동 원림과 같은 조선시대 ‘전통정원’과 국가정원 제1호인 ‘순천만 정원’이 있다. 또한 전남도 제1호 민간정원으로 등록된 고흥군 봉래면 ‘힐링파크 쑥섬쑥섬’부터 제18호 해남 ‘문가든’에 이르는 민간정원은 저마다 색다른 나무들과 꽃, 그리고 ‘정원지기’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박태후 화백이 50여 년간 가꾼 나주 ‘죽설헌’(竹雪軒)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원림(園林)이다. 또한 전남도는 2020년부터 ‘예쁜 정원 콘테스트’를 열어 남다르게 가꾼 민간정원을 발굴하고 있다. 올해 콘테스트 결과 ‘소나무와 함께 즐기는 정원’을 컨셉트로 내세운 신안군 암태면 ‘파인 크라우드’가 대상을 받았고, 화순 솔매음 정원(개인정원 부문)과 보성 성림정원(근린정원 부문)이 각각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요즘의 민간정원을 알기 위해 조선시대 전통 민간정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소쇄옹(瀟灑翁) 양산보(1503~1557)가 조영한 소쇄원(명승 제40호)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간정원, 별서(別墅) 정원, 별서 원림(園林)으로 평가받는다. 정암(靜庵) 조광조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던 그는 기묘사화(1519년)때 스승이 능주로 유배돼 사사(賜死)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 처사의 길을 택했다. 요사이 지속되는 폭염 속에서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곡리에 자리한 소쇄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느릿하게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절로 시원해지는 듯하다. 대봉대(待鳳臺)와 오곡문(五曲門)을 차례로 지나 나무다리(獨木橋)를 건너 제월당(霽月堂) 마루에 걸터앉아 비갠 뒤 떠오르는 보름달을 상상해본다. 아래에 자리한 광풍각(光風閣)에서 초록빛깔 풍광을 바라보면 마음속 번잡함이 사라지는 듯하다. 500여 년 전 조영된 전통 민간정원을 지금도 일부러 찾아가는 이유는 뭔가.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소쇄원-은일과 사유의 공간’(심미안)에서 “소쇄원은 곧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킨 문학적인 정원이다. 자연의 기운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로 합치되는 곳. 그곳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청각과 음영의 효과 - 이제는 우리도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소쇄원의 건축적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헤르만 헤세, 카렐 차페크, 타샤 튜더, 버지니아 울프, 프리다 칼로, 폴 세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이들의 공통분모는 손수 흙을 일구고 꽃과 나무를 심어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었다는 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웅진 지식하우스)에 실린 ‘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에세이를 통해 정원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원은 나에게 무한히 많은 것들을 부여해준다. 정원속 경치는 수년간 밤낮으로 매 시간, 어떤 계절이든 어떤 날씨든 가리지 않고 나에게 친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가 잎사귀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은 물론, 성장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친구이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 또한 ‘정원가의 열두 달’(펜연필독약)을 통해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원가는 집요하게 땅을 파내어 흙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를 게으른 사람들의 눈앞에 척 내보이는 존재다”라고 밝힌다.
세잔과 르누아르, 모네 등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도 정원을 가꾸며 작품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아르장퇴유와 베티유를 거쳐 1883년 파리 근교 지베르니로 이사했다. 집 앞 정원 ‘르 클로노르망’(Le Clos Normand) 화단에 다채로운 꽃과 식물, 나무들을 심어 가꾸었다. 이어 1893년에는 정원 아래쪽에 수경정원을 조성한 후 일본풍 다리를 설치하고 수련을 키웠다. 그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은 그러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지구 반대편 인상파 화가들 보다 한 세대 앞서 산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역시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정원을 꾸몄다.
#정원의 ‘은일’과 ‘치유’는 일맥상통
지금도 누군가는 우리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들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정원이냐?”라는 우문(愚問)을 받곤 한다. 그럼에도 다산과 인상파 화가, 그리고 현재의 우리가 자그마한 정원을 꾸미고자 하는 뜻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한 뼘의 땅조차 없는 이들이 당장 내 손으로 정원을 꾸밀 수는 없다. 부족하나마 창틀이나 베란다, 옥상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면서 대리만족할 수 있다. 서양 격언에 “너의 정원을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다”라고 한다.
정원은 당대의 자연관을 오롯이 담고 있다. 과거 전통 민간정원이 조영자의 ‘은일’(隱逸·세상을 피하여 숨음)을 위해 만들어 졌다면 현재의 민간정원은 방문자의 ‘치유’에 방점을 찍는다. ‘민간 정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공개되는 공간을 찾는 자체만으로도 정원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내 산재한 ‘민간정원’을 거닐면서 나무와 꽃이 품고 있는 정원지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중요한 것은 흙과 나무, 꽃, 식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는 일이다.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전남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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