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에 사는 50대 직장인 박모씨는 지난 주말 혼자 낚시를 갔다가 1시간 이상 진땀을 뺐다. 아내에게서 온 휴대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아내의 비명’이 들렸기 때문이다. 5초 안팎 이어지던 비명이 그치더니 낯선 남성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아내) 목소리 계속 듣고 싶으면 지금 당장 3000만원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박씨는 “아내 번호로 걸려온 전화인데다 때마침 아들과 장모 모두 전화 연결이 안돼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며 “송금 직전에 아내가 전화를 걸어와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수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 수법인 검찰 등 정부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을 넘어 금리 인상기를 맞아 이자가 낮은 대환대출(對還貸出)을 빙자한 대출형 보이스피싱이 올초부터 활개를 치더니 최근에는 실제 가족 전화번호를 뜨게하는 수법의 신종 보이스피싱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신종 수법은 피해자가 사기범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엄마·아내·자녀 등 가족의 휴대전화 번호가 발신번호로 뜨게 하는 것이다. 가족이나 지인 전화인 줄 안 피해자가 전화를 받으면 범인은 “가족을 납치 했으니 송금해라”는 협박을 하는 방식이다.
일부 피해 사례의 경우 사전에 피해자 개인정보가 유출돼 보이스피싱 일당의 타깃이 되기도 하지만 무작위로 발신한 전화에 걸려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예컨대 보이스피싱 일당이 조작한 발신번호 십수자리 중에서 피해자 휴대전화에 저장된 수백~수천개의 전화번호 가운데 뒷번호 4자리가 일치하기만 하면 피해자 휴대전화 화면에는 ‘친구 ○○’, ‘아내’ ‘아들’이라고 발신 번호가 뜬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물론 이동통신사의 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신종 수법인 셈이다.
광주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청은 이동통신사와 뒷번호 4자리 등 일부가 아니라 8자리 전화번호가 정확히 일치해야 수신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이 뜨는 방식으로 변경되도록 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며 “발신전화 표시의 정확도를 높이기 전에는 당분간 실제 가족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이 지속될 가능성이 큰만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수법이 날로 진화하면서 피해 건수는 날로 증가하고 피해 금액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광주경찰청에 접수된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는 2019년 358건이던 것이 2020년에는 715건으로 갑절이나 늘었다. 이어 2021년에는 624건의 피해 신고가 접수됐고 올들어서 5월까지는 모두 156건이 접수됐다. 피해 금액은 2019년 101억원, 2020년 158억원, 2021년 160억원으로 매년 증가세다. 올들어서 광주경찰청에 집계된 피해금액은 37억5000만원 수준이다.
올해 접수된 156건의 피해 사례를 유형별로 구분하면 ‘대출사기형’이 125건(80%)으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나머지 대부분은 ‘기관사칭형’(31건)으로 나타났다. 기관사칭형에는 ‘검찰사칭형’, ‘금융기관사칭형’ 등이 포함된다. 기존에도 자녀납치빙자형의 보이스피싱 수법은 있었지만, 신종 수법은 발신번호가 가족의 번호가 표시되게 하는 방법으로 진화했다.
경찰은 금융감독원 등 유관기관과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금융회사를 상대로 적극적 예방활동을 당부하는 한편 시민들에게는 보이스피싱 예방법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고 나섰다.
경찰은 평소 개인정보 관리에 신경써야 하고, 문자메시지를 정교하게 조작하는 만큼 문자메시지에 포함된 인터넷주소(URL)는 철저하게 확인하며, 되도록 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피해 예방의 가장 좋은 방법은 범행 수법을 인지하고 이러한 정보를 가족과 친척, 지인 등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인식 광주경찰청 보이스피싱 전담팀장(수사2 팀장)은 “발신번호를 통해 납치했다 등의 전화가 오면 전화종료 후 반드시 직접 가족 등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면서 “혹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바로 돈을 송금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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