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 꽃잎 지름 5.5m 2015년 뮌헨시 공공미술 선정 첫 선…‘108배 퍼포먼스’ 눈길
지난 2020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5·18 40주년 기념전 ‘별이 된 사람들’전은 기존의 오월 작품과는 다른 시선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당시 미술관 로비에 전시됐던 재독작가 김현수의 ‘백련’은 커다란 연꽃 조형물과 함께 108배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눈길을 끌었다.
2년여 만에 도심 사찰 무각사에 ‘백련’이 피었다. 미술관 전시 당시 이 작품을 눈여겨본 무각사 청학스님의 요청을 받은 김현수(67) 작가는 지난 4월 중순 독일에서 들어와 작품을 조립하고 설치했다. 사찰 내 작은 방에 머물며 작업을 진행한 그는 5·18 행사 등을 둘러보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무각사에서 만난 그는 “사찰에서 생활한 건 처음인데 아침 예불도 보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백련’은 지난 2015년 뮌헨시 공공미술에 선정돼 첫 선을 보였다. 특수 코팅한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백련’은 지름 5m 50㎝, 높이 2m40㎝, 18개 꽃잎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18개의 대형 알루미늄판은 하나 하나가 모양이 달라 독일 공장에서 제작할 당시 애를 먹었었다. 이번 무각사 전시에서는 연꽃 주위에 빙 둘러 기와를 깔았다.
“모든 종교와 문화, 인종, 이데올로기를 넘어 자기를 내려놓음으로서 많은 것을 포용하는 의미를 담아 연꽃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흔히 연꽃하면 불교를 떠올리는데 이집트, 그리스에서도 추앙받는 사유의 꽃이었어요. 로마의 건축물에도 다 연꽃 문양이 들어가 있거든요. 불교에서 더 많은 사유의 의미를 담아 발전시킨 거죠.”
김 작가는 “이 작품을 함께 나눈 이들, 108배를 올린 이들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는 게 의미가 있어 복제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련’은 부처님오신날이었던 지난 8일 첫 선을 보였고, 연꽃돌이와 108배 명상도 열렸다. 작품은 대웅전 앞에 설치됐으며 뮌헨 시청앞과 상트 오틸리언 수도원 등에서 열린 108배 행사 모습이 담긴 영상도 만날 수 있다.
“독일 전시에는 어른, 어린이, 장애인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어요. 왜 108배를 하는지 궁금해하던 이방인들은 108배를 다 마치고 나서는 의미를 묻지 않더군요. 종교적 의미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는 것을 안 거죠. 유럽에서는 종교적 숭배라고 생각하면 거부감을 보입니다. 종교적 의미 등을 떠나 당신 마음을 한번쯤은 내려놓아 봐라. 이 바쁜 세상에서 몇분 동안은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은 작품입니다.”
가부장적 의식이 강한 경북 의성 유교 집안에서 자란 김 작가는 ‘여자’라는 굴레에 갇혀 거의 말을 잃고 지냈다.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힘들어하던 그는 언제나 의지가 됐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올라가 금속 공예 작가로 활동했다. 이후 “홀로 서야겠다”는 마음에 20대 후반인 1984년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갔고, 뮌헨국립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작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만연했던 외국인 차별을 겪으며 그는 ‘살기 위해’ 작업했다.
“독일에서의 제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어요. 인간에 대한 실망과 원망도 많았구요. 힌데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결국 나를 해치는 것이더군요.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비우는 건 정말 어렵더군요. 작업을 할 때면 나를 잊는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나에게 몰두하는 것 그게 불교가 추구하는 마음 상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마음의 등불이었던 엄마는 독일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고, 큰 호응을 얻었다. 성당 안에 전시됐던 설치 작품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바침’은 각국 문화권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안은 모습을 형상화했고, 알록달록한‘색동천’으로 조각을 감쌌다. 어머니들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김 작가는 2014년부터 4년 정도 광양에 머물렀었다. 굴 따는 할머니, 시장 할머니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낸 시간이었고, 영상 작업도 진행했다. 지금 그는 당시 한국에 머물며 작업했던 다큐멘터리를 다듬고 있다. 촛불 현장을 경험했던 그는 1900년부터 촛불정국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담은 2시간 30분 분량의 다큐를 만들었다.
“참 어려운 일인데, 세상 살면서 겸손과 겸허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됩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그렀구요. 유럽 사람들이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맥락인 듯해요. 자신을 들여다 보고, 누군가가 힘들 때 함께 공감하는 마음은 잃지 않아야 할 것 같아요.”
연꽃 주위를 서서히 돌며 나를 한번쯤 내려 놓는 것, 바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휴식의 순간이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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