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지음
“어둠으로 빛을 감싸 매끈하게 묶어둔 일인용 우울 같다. 얼룩말이나 백호가 그러하듯, 자신 안에 빛과 어둠을 모두 지닌 역설.” 나에겐, 보랏빛 형광색이 꺼려져 어릴 적 기피음식 중 하나였던 ‘가지’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보이지도 않는 땅 속에서 엄청난 색깔을 지니게 된” 야채, ‘당근’에 대해서도, “점령하는, 물들이는, 뒤섞이며 휘저어지는, 강력한 전개.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인 ‘카레’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라고 말하는 이혜미 시인의 첫 에세이집 ‘식탁 위의 고백들’이 나왔다.
2006년 등단 후 시집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 ‘빛의 자격을 얻어’ 등을 펴낸 시인은 “좋아해요,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 놓았습니다”라고 말한다. 타인을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고, 거식과 자폐와 실어와 폭식을 오가며 10대를 보냈던 그녀가 “혼자 껴안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함께 마주할 식탁을 향해 걸어온 시간들”은 “요리를 통해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마음의 발현이기도 하다.
총 28개장으로 구성된 책은 전채, 메인 디시, 디저트가 어우러졌고 특히 사계절의 정취를 녹여낸 다양한 요리들로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저자는 아보카도, 달래, 당근, 토마토 등 식재료에 관한 글부터 파스타, 스테이크, 치즈, 스프와 스튜 등의 본격적인 요리,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에 따르는 단상을 책 한권에 담아냈다. ‘웰링턴’ ‘무사카’ ‘멜란자네’ 등 다소 생소한 요리는 조리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요리 과정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 클립도 제작했다. 또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사진은 이 책을 읽는 이의 입맛을 한껏 돋운다.
책은 요리책이면서, 길게 읊조린 시집이면서, 일상의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을 기록한 일기장 같은 느낌을 준다. 연어를 자르며 “미래를 향해 긴 엽서를 쓰는 상상”을 하고, 카레를 만드는 것을 “외따로 떨어진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어떻게든 이음새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라 일컫는 시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요리’에서 출발한 무궁무진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마지막 글 ‘우리의 작은 댐이 무너지지 않도록’의 주인공 ‘커피’ 관련글 중 “이제 막 생겨난 검고 작은 분화구에 뜨거운 물을 부어 희고 연약한 구덩이를 만드는 일은 창조자와 파괴자로서의 만족감을 동시에 선사한다”는 대목을 읽으면 오늘 내가 내리는 커피 한잔 속에 ‘네버엔딩 스토리’가 담겨 있는 듯한 생각도 든다.
연재 당시 “반짝이는 낱말들로 꾸며진 한끼를 대접받은 기분”, “쉽게 보고 지나치는 대상을 다르게 보는 관찰력에 감탄했다”는 글들이 올라왔다는데, 책을 읽다 보면 딱 그런 마음이 든다.
<창비·1만40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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