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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기자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8> 유격전술의 달인 의재 박영근

by 광주일보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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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기습 신출귀몰…불갑산·석문동 전투 일본군 타격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서 가난한 선비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혼인하자마자 의병 가담 결의 젊은이들 모아 거병
호남창의맹소 종사·대동창의단 호군장 맡아 군수품 보급
밀정 김현규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 1910년 형장의 이슬로

함평 유림들이 세운 박영근 순국비를 조동수 전 광주일보 주필이 살펴보고 있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박영근의 호는 의재로, 1885년(고종 22년) 9월 15일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유덕산)에서 박광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재환이다.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두 형 영서, 영유가 태어난 뒤 광엽의 부인이 마른 날 갑자기 비바람이 심해지고, 집 뒷마당 쉬나무에 벼락이 떨어졌으나 오히려 더 잘 자라는 태몽을 꾸고 영근을 가졌다. 세 아들 중 가장 영특해 둘째형 영유의 품팔이로 서당에 다니게 돼 스승 정우명을 만났다.

10세가 되던 해 을미사변, 단발령 등의 소식이 전해지자 정우명과 북향사배하고 목놓아 울었다. 정우명이 이후 글방을 닫고 두문불출하자 영근은 40리 떨어진 광산구 본량면 도림리의 오영숙에게 글을 배웠다. 늠름한 기상과 반듯한 용모의 오영숙은 영근을 데릴사위로 점찍어 19세의 나이가 되자 자신의 딸과 혼례를 올리게 했다. 영근은 혼인하자마자 의병 가담을 결심하고 젊은이들 규합에 나섰다.

나라의 주인은 양반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그에게 농민, 포수 등이 몰려 들었고, 함평에서 거병한 죽봉 김준이 찾아왔다. 김준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영근은 기삼연이 보낸 창의격문을 보고 호남창의맹소에 적극 참여하기로 약속한 뒤 행장을 수습해 유덕산으로 돌아와 두 형과 스승 정우명에게 거병을 알렸다. 이어 부인 오씨를 만나 하룻밤을 자고 출발해 장성의 기삼연을 만나 호남창의맹소의 종사로 복무했다. 영근은 각지를 돌며 세력가나 부호에게 군량미 및 병기를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08년 2월 기삼연이 체포돼 광주천에서 처형되고, 이어 3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김준이 전사하면서 호남 의병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오성술, 조경환은 재기하기 위해 광산 용진산에 주둔하고, 박영근은 조경환과 함께 김준의 복수를 다짐하며 해산 전수용과 함께 흩어진 의병들을 규합했다. 1908년 6월 결성한 전수용의 대동창의단(대동의맹소)에서 박영근은 호군장을 맡았다.

영근의 사람됨에 함평군 월야면 정경안이 400냥, 영광군 영광읍 조희경이 500냥, 영광군 대마면 오석근이 100냥과 400냥짜리 수표 등을 자진 헌납하기도 했다. 영근이 병기와 군량을 조달해 약 100여 명이 무장한 뒤 1908년 7월 25일 영광 불갑산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참살하는 등 전과를 올리고 광산구 삼도동 석문동 전투에서도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이 같은 승리에는 일본군의 정보를 제대로 전달해준 스승 정우명, 이덕중, 김찬문, 신동욱 등의 도움이 있었다. 신동욱은 남일 심수택, 해산 전수용, 태원 김준 등이 거병하는데 실질적인 지주 역할을 했으며, 나중에 순국한 심수택의 아들도 키웠다. 주민들은 이처럼 몰래 숨어 의병을 돕는 이들을 ‘앉은 의병’이라고 불렀다. 군량을 구하러 처가가 있는 도림리에 내려갔다가 밀정에게 발각된 영근은 일본군 7명의 추격을 받았다. 20여리를 도망치다가 민가에 들어가 절구질을 하던 새댁에게 눈짓하고 아기를 받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후 일본군과 밀정이 집안으로 들이닥치자 방안에서 문을 열고 아기 젖을 물려달라는 영근에게 일본군과 밀정은 사라진 남자의 행방을 묻고 사라졌다. 새댁은 영근을 아는 사람이었다.

1909년 3월 해산 전수용이 영광 오동촌에서 큰 타격을 입고 흩어졌는데, 이 때 전수용은 모든 군무를 영근에게 맡기며 허리에 차고 있던 대장인과 망원경을 넘겼다. 수용은 “호남 3월에 살구꽃이 지는데 나라 위한 서생이 갑옷을 벗네. 산새들도 세상일을 아는지 밤새도록 나를 불러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네.”라고 시를 건네자 영근은 “살구꽃 3월에 눈발이 날리니 뜻있는 남아가 갑옷 벗을 날 없구나. 장차 내 국토를 회복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는 돌아가도 살아서는 못가겠네.”라고 답시를 건넸다. 굳은 의지를 보인 영근은 30여 명을 이끌고 유격부대로 재편성했다. 당시 오성술은 용진산, 김원범은 무등산, 이인산, 정인술, 서감학, 양창국 등도 산악지대에 웅거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했다. 영근은 도집사에 김성현을 임명하며 대오를 정비했다.

1909년 봄 일본군이 대반격을 시작하자 영근은 영광 오동촌 근처 묵동에 숨겨둔 병기와 탄약을 찾기 위해 오동촌을 찾았다. 일본군 소부대가 오동촌에 주둔하고 있어 영근은 홀로 농민으로 위장해 오동촌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일본군 30여 명은 의병의 기습에 대비해 경계를 삼엄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1909년 5월 4일 영근은 30여 명을 이끌고 오동촌과 묵동 인근 산골짜기에 매복했다. 의병들의 공격에 일본군 7~8명이 쓰러졌으며, 영근은 오동촌의 일본군 진지를 깨뜨리고 9정의 총과 500여 근의 탄약을 탈취해 불갑산으로 돌아왔다.

광주 광산구 삼도면의 용진산 전경. 의병장 박영근은 물론 이기손도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뒀다.
 

1909년 6월 14일 함평군 양림리 공금영수원 김돈섭에게 현금 100냥을 받아 총 5정과 탄약을 구입했으며, 편진성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보총을 영근에게 건넸다. 6월 19일 영광군 불갑면 건두산에서 일본 헌병·수비대와 의병 간의 일전이 벌어졌다.

영근을 붙잡기 위해 불갑사로 향하고 있던 일본군을 영근이 기습한 것이다. 비좁은 길에 1진을, 개울가 바위 뒤에 2진을 매복시켜 일제히 공격하자 일본군은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영근의 신출귀몰한 군사작전에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영근의 부인 오씨를 붙잡아 인질로 삼은 뒤 고문하고 임신한 부인을 끌고 다니며 욕을 보였다.

부인 오씨는 나산분견소, 함평분견소, 고막원분견소 등에 무려 8번을 끌려다니다가 1909년 7월 7일 나산주재소 유치장에서 딸을 낳았다. 이 때 영근은 도집사 김성현의 의견에 따라 진지를 나주 용문 소약동으로 옮겼는데, 의병 중 한 명이 일본군에 투항하면서 영근의 부대 내 사정을 일본군이 모두 알게 됐다.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에 영근은 의병을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 도집사 김성현의 해산 권유에 군복을 벗고 장성군 동화면의 매형 김희진의 집에 은거했다. 일본군은 영근에게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됐는데, 처가가 있는 광산구 도림리를 찾아 선비 오영수의 집에 3~4일을 머물렀다.

그런데 밀정 김현규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일본 헌병을 데리고 와 영근을 붙잡았다. 1909년 7월 30일 영산포주재소로 끌려갔으며, 1910년 6월 3일 광주재판소에 이어 대구 고등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7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형인 영유가 시신을 수습해 함평군 나산면 선영에 묻었으며, 함평 유림들이 함평공원에 순국비를 세웠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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