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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기자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우국충정의 마음을 시에 담은 금재 이기손

by 광주일보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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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용진산 1·2차 전투에서 일본군 190명 사살 전과
광산군 본량면 장등부락 농부 이영의씨의 맏아들로 태어나
격문 형태 우국시 지어 보내자 청장년들 몰려들어 의병 모집
무안·완도 등서 수많은 전투 야간 기습·게릴라 작전 큰 전과
1943년 부인·자식들 못만나고 66세의 나이로 타지서 숨져

용진산은 광주 광산 본량면 동북쪽에 있다. 천혜의 요새로, 이기손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두 차례 싸워 모두 이겼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충의와 용맹이 몸에 담겼으니 가슴 속에 병권을 잡고 왜적을 치리라.”

이기손이 지은 시 22구 가운데 한 구절이다. 1877년 2월 14일 광산군 본량면 북산리 장등부락에서 농부 이영의와 어머니 청안 이씨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효령대군 17대손으로 9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해 신동이라 불렸지만, 집이 가난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서 공부를 했다. 광산구 삼도동 도림리 후석 오준선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2세에 또래 소년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는데, 15세에 나주 오병수의 맏딸 오대명을 아내로 받아들여 2남1녀를 뒀다. 과거는 거부하고 도학에 관심을 둬 20세가 넘어가면서 역리, 천문, 지리 등을 공부했다.

30세 되던 1907년 7월 고종이 양위를 하고 8월 군대가 해산되자 기손은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촌로, 장정 등과 의논한 뒤 모병에 나섰다. 해산 전수용, 태원 김준 등과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들은 기손에게 광산, 나주, 함평 일대에서 싸워줄 것을 부탁했다. 우국시를 지어 격문 형태로 곳곳에 보내자 청장년들이 몰려들어 이 가운데 800여 명만 선발하고 나머지는 부족한 군량과 무기를 이유로 돌려보냈다.

금재 이기손 장군의 의적비는 지난 1975년 6월 1일 후손과 지방 유지들이 세웠다.
 

1907년 가을부터 1908년 1월까지 3~4개월만에 손자병법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고, 상장군은 이기손이 맡았다. 의병 수뇌부를 선봉장 박일동·엄석훈, 중군장 양동환, 호군장 김선원, 우익장 정만선, 좌익장 조만길, 포대장 김봉선, 서기 이재훈 등으로 구성했다. 확보한 총기는 약 500정으로, 기손은 본량의 부호 문장환 등 애국 유지에게 호소해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으고, 장성군 삼서면에 사는 이근숙에게 이를 맡겨 조금씩 사용했다. 1908년 1월 하순 기손은 오씨 부인과 맏아들 일봉, 둘째 이봉, 딸 복임 등을 불러 거병의 이유를 설명하고 광산구와 장성군의 경계에 자리한 용진산으로 향했다.

진지를 구축하자 동북방면에 나갔던 척후병에게 일본군 500여명이 진군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기손은 1진에 소총, 2진에 대포를 줘 매복시켜두고 참모와 군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일본군 115명이 숨지고 100여 개의 총을 놔둔채 후퇴했다. 다음날 700여 명으로 병력을 늘려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자 그는 중군장 양동환, 우익장 정만선, 좌익장 조만길 등에게 각각 50명씩 데리고 가 싸운 뒤 지치면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2차 전투에서도 일본군 7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의병 역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포대장 김봉선 역시 오른쪽 허벅지 관통상을 입어 본량면 동호리 본촌부락으로 내려 보냈다. 이 용진산 1·2차 전투에서 일본군만 19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거점이 노출된 기손은 광산구 삼도동 석문산을 답사한 후 진지를 옮겼고, 장성 기삼연, 담양 김준 등이 공동 작전을 제안하자 일부 의병만 남기고 주력부대 300여 명을 이끌고 담양 김준과 합세해 작전을 협의했다. 무동촌(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 기세를 떨친 요시다 부대를 공격하기로 한 이들은 동서로 군대를 나눠 공격해 요시다를 죽이고 그 부하 5~6명을 사살했다. 1908년 1월 1일이었는데, 일본 경찰이 적은 전남폭도사에서도 이날의 전투는 기록돼 있다. 기우만이 엮은 호남의사열전에서는 김준이 요시다가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직접 칼로 죽였다고 쓰여있다.

담양에서 승리한 후 석문산으로 회군하는 길에 광산구 삼도동 세하부락에서 군량미와 군자금을 마련했는데, 나중에 이를 안 일본경찰 7~8명이 주민 오문현 등 10여 명을 연행했다. 뒤늦게 이를 안 기손이 추격하자 일본 경찰들은 주민들을 풀어주고 도주했다. 이후 일본군들이 석문산으로 쳐들어와 포위한 뒤 수색에 나서자 기손은 산죽, 짚, 칡넝쿨, 나뭇가지를 두텁게 엮어 둥글게 만든 뒤 그 안에 3~4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앞으로 진격하는 방법으로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피하며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1909년 봄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 해군의 거점인 신안 지도 공격을 결정했다. 야간 기습과 게릴라 작전으로 의병들은 큰 성과를 내고 있었으며, 무안·목포·해남·진도·완도 등의 연안에서 주로 머물렀다. 1908년 12월 27일 일본 잡화상선을 공격하고, 1909년 1월 10일 무안에서 사냥하던 일본을 기습했다. 1909년 3월 6일 전남관찰사 신응희가 상부에 의병의 심각함을 보고했으며, 그 결과 일제는 수비대를 늘리고 조선인을 헌병보조원으로 고용해 스파이로 이용하는 등의 전략을 폈다. 이에 따라 호남 의병은 1908년을 정점으로 1909년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지도 공략을 위해 기손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3일 동안 훈련한 뒤 본진에 선봉장 엄석훈, 중군장 양동환, 후군장 김선원 등을 남기고 포대장 김봉선, 이원복, 김만수 등을 대동했다. 1909년 4월 하순 진도, 완도 등으로 발길을 돌려 일본군들을 무찔렀다. 다시 해남, 영암, 나주를 거쳐 두 달 만에 석문산으로 들어온 그는 진지를 함평 나산의 유덕산으로 옮겼다. 영광 방면으로 출병해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에서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해산 전수용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기손은 영광 묵동전투에 참여한 뒤 되돌아오는 길에 자칭 의병을 칭하며 노략질을 하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광 일대를 수색해 일당 10명 중 3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기손은 의병의 수가 800여 명에서 크게 감소하자 고창 봉산 아래 극오동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이 시기 일제는 남한대토벌을 3단계로 나눠 시행하고 있었다. 1단계는 토벌지구 포위, 2단계 서남해안 20~60세 조사, 3단계 도서지역 20~60세 조사 등이었다. 일본군은 1909년 9월 1일 보병 2개 연대 2260명을 호남에 투입하고 현지 경찰 역시 총동원해 의병 수색에 나섰다.

해산을 건의하는 부하들을 꾸짖었던 기손은 결국 9월 초순 해산을 결정하고, 이를 발표했다.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한 일제는 당초 40일 기간을 15일 늘려 10월 25일까지 전개했다. 이 기간 피살 또는 체포된 의병장은 모두 103명이었고, 19명은 자결했다. 이후에도 수색은 계속돼 10월 29일 순창 김재봉, 10월 30일 전북 북성동 전수용과 조규선, 11월 3일 고창 박포대, 11월 8일 정읍 김영백이 체포되고 조창국이 자수했다.

기손은 “왜적은 날로 늘고 아군은 줄어만 간다. 서로 세력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네. 헛되이 적에게 죽고 만다면 나라 위해 무엇이 유리하리오.”라는 해병시유감(解兵時有感)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광산에 살던 처자를 만나러 갔다. 자신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일기 2권을 들고 광산군 삼도동 도림리에 사는 만헌 오필선에게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부하 의병을 만났는데, 그 역시 기손에게 자수를 권했다.

당시 기손은 시를 지어 그 때의 심정을 표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적 무리 씨도 없이 죽이려 기약했으나, 포획한 것 헤아리니 불과 수백이라. 하늘이여! 하늘이여! 통곡하나니 적들은 나의 갈 길을 뒤쫓지 말라.” 일본 헌병과 경찰은 가족들을 괴롭혀 사촌형 이기룡은 시달리다 못해 실종됐고 모진 고문을 당한 부인 오씨는 2년간 삼남매와 함께 장성군 삼서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홍정 백진사라는 사람이 밥을 넣어주었다가 고문을 당하는 등 일제의 괴롭힘은 집요했다.

이 때 기손은 군산항으로 가 이승만을 만나 하와이에 망명하려했으나 여권 문제로 실패하고, 청진으로 가 만주와 러시아를 오가며 5년을 지냈다. 2년만에 풀려난 오씨 부인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웃들은 화를 입을 까봐 접촉을 피했다. 문전걸식하며 살던 오씨는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삼남매 중 둘째 이봉은 병으로 사망했다.

국내 잠입 기회만 보던 기손은 1915년 봄 몰래 두만강을 건너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에서 잠시 거주하기로 했다. 정도손이라는 부자에게 의탁한 뒤 이름을 연해로 고친 그는 재혼해 1남2녀를 두고 금성면 장목리로 이사했다. 38세의 기손은 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며 지냈다. 그는 영영 오씨 부인과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1943년 66세의 나이로 타지에서 숨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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