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윤현석기자

안방준·이상원·나해륜·나해봉…병자호란에 다시 일어선 남도의 의병장들

by 광주일보 2021. 10. 23.
728x90
반응형

형제의병장 나해륜·나해봉,  전라 일대 격문 돌리고 의병장 설치
제월정 이상원,  의병·군량 모아 전북 여산으로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평안남도 안주성에서 청나라군과 싸우다 순절한 전상의(1575~1627)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충민사. 정묘호란이 끝난 뒤 시신을 출생지인 광주로 옮겨 예장하였는데, 1977년 묘소가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1592~1598)을 겪은지 30년이 채 안 돼 우리나라는 또 한 번 후금의 대규모 침략을 당했다. 1627년 1월 17일 중원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후금이 3만명을 이끌고 의주성을 공격해 의주부윤 이완(이순신의 조카이자 명장)이 전사했으며,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다.

같은 해 3월 후금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 것이 정묘호란이다. 그 10년 뒤인 1636년(인조 14년) 12월 9일 청나라 29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병자호란이 발발했으며, 1637년 1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궤구고두’를 하며 항복했다. 1636년 12월 16일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가 전국 각지에 교유문(敎諭文)을 보내 근왕을 촉구하자 호남지역 곳곳에서 양반, 농민 등이 거병해 북진했다.

청강 조수성

조수성은 1570년(선조 3년) 12월 6일 화순현 녹부리에서 조굉중과 광산 김씨 사이의 삼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22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집에 머물다 남해안의 한 섬으로 피신했으며, 이후 돌아와 36세에 생원이 됐다. 66세의 나이에 셋째 동생 조수훈, 그의 아들 조카 조엽과 함께 인조의 교유문을 읽으며 통곡한 조수성은 곧바로 집안 청장년들과 산이, 무진, 김용이 등 머슴 100여 명을 모아 거병했다.

화순 만연사에서 청색과 황색 깃발을 만들어 들고 꽹과리와 징을 치며 북으로 진군했다. 화순현감 유의문은 수성을 위로하고 객사 가운데 대청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했으며, 화순유림 임시태와 최명해가 찾아왔다. 임시태는 형 시계, 동생 시민, 시진, 시분, 시약 등과 사촌동생 시준, 시익 등 8형제가 의병에 참가했다. 수성은 대장장이 7명, 활 제작자 9명 등에게 무기 제조를 지시하고 광주, 능주, 나주, 남평, 동복 등 곳곳에 격문을 보냈다.

 

격문을 받아든 광주의 고부립, 박사원, 유차환, 신필, 나주의 유준, 최진강, 홍명기, 이환. 능주의 양우전, 문제극, 민팽령, 남평의 서행, 정반, 윤숙, 동복의 정노민, 김성원 등이 호응해 찾아왔다. 화순의 유함, 김진성, 김위징, 배홍립, 편성대, 한명남 등도 자원하고, 1636년 12월 27일에는 각지의 사찰에서 물품을 보내왔다.

1637년 1월 1일 옥과현감 이흥발, 순창현감 최온, 전직 한림 양만용, 전직 찰방 유집 등과 작전을 숙의하기도 했다. 이 당시 수성의 의병은 524명에 군마 54필, 활 150개, 창 85개, 군량미 150석 등을 갖춘 상태였다.

1월 11일 화순을 출발한 수성은 직접 대장을 맡았고, 선봉장에 최명해, 좌군장 고부립, 중군장 조엽, 우군장 유준, 후군장 임시태, 독전군관 편성대 등을 임명했다. 전날 음주로 낙오한 머슴의 우두머리인 김무진의 목을 베며 군기를 세운 수성은 광주에서 선비 40여 명을, 다음날 장성에서 김지실·남실 형제, 이불 등을 만나고, 13일 갈재 아래에서 노숙했다. 14일 태인에서 이경환의 대접을 받은 뒤 16일 전주성에 들어가 들어가 옥과현감 이흥발과 조우했다.

안방준은 1627년 1월 정묘호란,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거병했다. 병자호란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으며, 네 아들 후지, 신지, 심지, 일지 등에게도 종군을 명했다. 사진은 1657년 지방유림들이 뜻을 모아 안방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신 대계서원.
 

문강공 안방준

안방준은 1573년(선조 6년) 11월 20일 보성 오야리(현 보성읍 우산리) 진사 중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언, 호는 은봉 또는 우산, 본관은 죽산이다. 1581년 방준이 8세에 계부 안중돈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11살 죽천 박광전의 제자로 들어가 정진했다.

임진왜란 당시 임계영의 밑에서 종사했으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직접 거병하기도 했다. 14세에 매부 박종정 밑에서 글을 배우고, 15세의 나이에 ‘이대원전’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대원은 20세의 나이로 1587년 남해안으로 침입해온 왜구와 손죽도에서 3주간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이 장군의 전공이 도망간 수사 심암에게 돌아가자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방준이 책을 남긴 것이다.

17세에 좌승지 정승복의 딸과 결혼했으며, 19세에 임란이 발발했다. 스승 박광전과 함께 700여 의병을 규합하고, 의병대장 임계영의 종사관으로 나섰다.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살아온 그는 김천일 등 진주성에서 전사한 의병들의 이야기를 담은 ‘진주서사’를 집필했으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토적의 길에 나서 충북 대원산에서 수십 명의 적을 사살했다.

임란이 마무리되자 보성에 포은 정몽주의 ‘은’과 중봉 조헌의 ‘봉’을 따와 은봉서원을 짓고 고경명, 김천일 등 호남 의병장들의 치적을 적은 ‘호남의록’과 김덕령의 신원을 요구하는 ‘삼원기사’ 등을 저술했다.

인조반정 이후 예조판서 이정구의 추천으로 동몽교관, 동포서별제, 찰방 등에 임명됐으나 사양했으며,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주까지 갔으나 강화조약 소식에 다시 돌아왔다. 1636년 12월 9일 국호를 청으로 고친 청태종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방준은 64세의 나이에 다시 거병하며 네 아들 후지, 신지, 심지, 일지 등에게 종군을 명하고, 인근 고을에 창의 격문을 보냈다.

그 격문에는 20세 이상 50세 이하 백성은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적었고, 700여 명이 모여들자 의병장에 추대됐다. 방준은 군관에 신지후, 김여동, 김종원, 김정망, 이강, 정영길, 김점, 김진, 김태웅, 장정, 백언현, 김유신, 남기문, 김기원, 양지남 등을, 참모관에 선시한, 서기에 원이일, 정염, 김여용, 안후지, 안신지, 손각, 윤동야 등을, 군량관에 이무신, 방량관에 제경창 등을 각각 임명했다.

간단한 훈련을 마친 후 1638년 정월 보성을 출발, 장성, 금구를 지나 충남 공주에서 순찰사 이시방을 만나 합세했다. 화순 최계헌(임란 최경회의 형 최경장의 손자)이 군량을 모아 합류하고, 16세의 어린아이인 나주 홍명기, 200여 명을 데리고 온 장흥 백안현, 박춘수·박진정 부자와 박진정의 숙부 박수춘 등이 청주에서 합세했다.

이외에도 박유제, 박동건, 정직, 정영철, 박안인, 박진호, 송역, 이복인, 송후립, 박영발, 황석준 등 애국선비들이 참여했다. 북진하던중 1637년 1월 30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전해들은 뒤 의병을 파하고, 보성에 은둔했으며,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 공조참의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사양했다.

보성에 우산정사 영월정을 짓고 후학 양성과 저술에 공을 들였으며, 그가 남긴 서적은 진주서사, 항의신편, 호남의록, 임정충절사적, 혼정편록, 사우감계, 기묘유적, 을축기사, 부산기사, 노량기사, 임진기사 등에 이른다. 1821년 순조가 문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형제의병장 나해륜·나해봉

형제의병장 나해륜과 나해봉은 사촌 간으로 한울타리인 나주시 금계동 117번지에 태어났다. 해륜은 1582년 7월 14일 나덕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응숙, 호는 송도다. 5세에 글을 읽고, 8세에 영광 출신 강항의 문하에 들어갔다. 해봉은 해륜과 사촌 관계로 한 살 어리다. 자는 응서, 호는 남간으로 함께 강항에게 글을 배웠다.

해봉은 임진왜란 당시 병이 깊은 아버지를 모시고 피난을 떠났다가 왜적에게 붙잡혔으나 효심에 감동한 왜장이 풀어주기도 했다. 전란 후 집에 돌아온 해륜과 해봉은 자신들이 피난 전 곳간 자리 땅 밑에 묻어둔 쌀을 꺼내 부모를 공양했다. 해륜과 해봉, 해봉의 형 해룡은 나주 진광사에서 함께 공부했으나 벼슬길에 나서기보다는 학문 정진에 힘썼다.

인조 반정 이후 1624년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해봉은 나주 공관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출정하기도 했으나 난이 평정되자 의병을 해산하고 초야에 묻혔다.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해봉은 나주공관에 의병청을 설치해 300여 명을 모아 전주로 나아간 뒤 46세에 동당별시에 합격, 49세에 종6품 승의랑수성금화사별제에 이어 정5품 별좌에 이르렀다.

이후 1년이 채 안 돼 해봉은 귀행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해륜의 집에 모인 해봉, 해구 등은 전라도 일대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청을 열었다. 찰방 전선, 생원 홍과·홍련, 진사 홍남주, 전 참봉 오이건, 홍치진, 최대, 오수익 등이 곡식과 무기를 들고 합세했다. 이들은 500여 명의 의병과 나주 객사 남쪽에 단을 쌓아 맹세하고 해구, 해륜, 해봉 등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해남, 강진에서도 의병들이 몰려왔으며, 군량 최억담을, 서기에 나준을, 군관에 나휴를, 군사주서에 나준과 나휴를 임명했다. 나준과 나휴는 해봉의 두 아들이며, 해륜의 둘째 나경은 17살에 선봉장에 섰다. 해륜·해봉이 이끈 나주 의병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 의병과 합류하고, 여기에 옥과현감 이흥발 형제, 순창현감 최온, 전 한림 양만용, 유즙 등이 참여했다.

청나라 원정군은 청주에서 의병의 진군을 저지하고 나섰으며 대치하던 중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했다. 치욕의 후퇴를 한 해봉은 이후 바다 유람으로 시간을 보내다 1638년 5월 28일 55세 나이로 남간정사에서 숨졌으며, 해륜은 나주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김천일의 사우를 세우고 정열사 시비를 손수 건립하기도 했다. 1659년 12월 22일 77세로 숨졌다.

제월정 이상원은 아버지 이척이 남한산성에서 고군분투하자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북 여산, 청주까지 이르렀으나 인조의 항복소식을 듣고 영광으로 내려와 제월정에서 은둔했다. 사진은 영광 제월정 터.
 

제월정 이상원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훈련도정 이척의 아내 한씨가 9월 7일 한양에서 피난을 가며 낳은 이가 제월정 이상원이다. 자는 순경, 호는 제월정 또는 만취당, 애국헌 등을 썼다. 20세에 기대승의 증손녀이자 현감을 지낸 기정헌의 무남독녀를 아내로 맞았다. 간신 이이첨을 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10년간 과거 응시가 금지돼 벼슬길에 나가지는 못했다.

이후 조부의 고향인 영광군 대마면 월산리 법성포에 내려와 강항의 문하에서 공부한 지 12년만인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당시 죽산부사였던 아버지 이척은 문무를 겸비해 조정이 정한 장상지재(장군과 재상이 될 인재) 10인에 포함될만큼 명성이 있었다.

이척은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아들 상원은 의병을 일으켰다. 만 40세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과 군량을 모은 상원은 1637년 1월 3일 의병 200여 명을 모아 영광을 출발해 전북 여산에서 이흥발·이기발 형제, 최운, 양만용, 유즙, 안방준, 조수성 등의 군사와 1월 20일 회맹을 맺었다. 1월 22일 여산을 떠나 30일 청주에 이르렀을 때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상원은 근왕중이던 아버지 이척을 보기 위해 의병들과 작별했다. 이척이 68세에 세상을 뜨자 영광으로 내려와 제월정에서 은둔했다. 효종이 등극한 해 조정은 이상원에게 의금부 도사를, 56세에 경안역찰방을 제수했다. 60세에 다시 영광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1662년 3월 29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충민공 양산숙, 도끼 멘 채 日 통신사 파견 반대 상소 올려

충민공 양산숙양산숙은 1587년 자신이 26세 때 대마도 도주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가 강화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을 찾아오자 남원의 양대박과 함께 국왕의 사신인 것처럼 꾸며 염탐에 나섰

kwangju.co.kr

 

<18>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②

임진왜란 의병장들은 거병 전에는 조정에 출사해 벼슬을 지낸 뒤 귀향했거나 여러 이유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한 양반이었다. 이들은 어릴적부터 글, 무예 등에서 남다른 솜씨를 보여 일찍

kwangju.co.kr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