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처음으로 삼림에서 나와 초원을 밟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대략 35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19세기까지는 대체로 유목 문명이 인류의 역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정주문명과의 충돌, 융화가 있었으며 두 문명은 서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었다.
사실 현대문명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급속히 발달했다. 한마디로 정주문명이 있어 가능했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고정된 일터와 주거지가 있다는 것은 문명의 발전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다.
정주문명과 함께 인류 역사를 이끈 유목문명은 이색적인 주제로 흥미롭다. ‘유라시아 신화 기행’, ‘여행하는 인문학자’의 저자 공원국이 펴낸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 기행’은 “우리 안의 유목민을” 찾는 여정이다. 아울러 저자는 유목과 정주, 두 문명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들여다본다.
가장 먼저 상호작용의 첫 번째 계기로 여신 신앙을 주목한다. 고대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담당하고 있다는 믿는 여신 신앙이 부흥했다. 그러나 농사가 보편화되고 국가의 체제가 잡히면서는 정주문명이 힘을 얻었고 자연스레 여신신앙은 핍박을 받는다. 여신은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무렵 “척박한 환경에서 동물의 욕구를 맞추며 탄생한” 유목문명에서 안식을 찾는다.
저자는 여신 신앙이 자취를 감추지만 착취와 비착취라는 근원적 차이를 주시한다. 최초 유목국가를 세운 스키타이는 정복해도 지배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충돌할 상황에 이르자 그들은 “우리는 잃을 도시도 곡식을 심을 땅도 없다”고 경고했다.
유목문명과 정주문명이 충돌만 한 것은 아니다. 융화는 물론 서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거나 길을 제시했다. 저자는 위구르와 당나라의 관계에서 그 예를 제시한다. 기원 전 200년 전부터 한무제 등장 전까지 70여 년간 흉노와 한나라는 충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립과 타협으로 위기를 서로 관리했다.
유목문명 안에서 폭력을 반성하고 창조를 모색하는 도덕률이 탄생한 점은 흥미롭다. 고대인의 설화를 보면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던 인드라는 악신으로 폄하되며 이와 달리 창조의 신이 등장한다.
저자는 유목문명의 제일 척도인 자유의 가치를 주목하며 이때의 자유는 이동뿐 아니라 생각까지 포괄한다. 그러나 모든 유목민이 자유의 가치를 수호한 것은 아니다. 유목집단이 국가로, 제국으로 변모해가면서 등장하는 세력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은 기존의 씨족, 부족 체제와 완전히 다른 호(戶) 단위로 몽골제국을 조직하고 늘 이 같은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병영국가’ 탄생을 견인한다.
칭기즈칸이 죽고 티무르라는 자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것도 잠시뿐 유목문명은 존재감을 잃고 만다. 이후 등장한 카자흐는 부족장들과 부족민 의사를 존중했으며 지역 평화 유지를 위해 애썼다.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모굴리스탄칸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여기에는 유목문명 특유의 공유와 환대의 가치가 놓여 있다.
저자는 유목민은 모두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똘똘 뭉치는 ‘사냥꾼의 윤리’를 견지했다며 그것이 바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비법이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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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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